탈북자들의 수기

    등록일 : 2012-02-13 오전 9:59:22  조회수 : 8032
  31 . 자유를 향한 도전
  등록자 : 관리자        파일 :

- 북한에서 태어난 나
사람이 사람으로 태어나 인간으로서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살게 된다면 그것만큼 슬픈 인생이 또 있을까? 우리는 북한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태어나면서부터 요구 받는 삶을 살았고, 만들어주는 삶을 살았고, 만들어주는 행복에 만족해야만 하였다. 지금 돌아보면 화도 나고 억울하기도 한 삶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런 삶을 통하여 지금의 삶에 더 감사하며 살게 되지 않았는지 위로해보기도 한다.

북한은 자유가 없는 나라이다. 어린아이부터 세뇌를 시킴으로써 한 사람을 사람이 아닌 우상으로, 사람보다 위대한 자로 각인시켜 신과 같이 숭배하도록 교육한다. 나 또한 그런 교육을 받고 자란 북한 사람 중 한 명이다.

  그 당시는 김일성만 있으면 우리는 아무 걱정과 근심이 없고, 아무런 고난도 없을 것이며, 그 어느 나라보다도 더 잘사는 나라이며 행복한 나라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신념과 믿음들이 부질없었던 것임을 남한에 와서야 더더욱 피부로 느꼈다. 진정한 자유가 무엇이며,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진정한 나의 삶은 어떤 삶인지 남한의 삶은 나로 하여금 다시 태어나도록 해주었다. 내가 열심히 일하는 것만큼, 내가 노력하는 것만큼 주어지는 성과들은 나의 삶으로 하여금 이 세상을 이겨내면서 살아가는 힘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 태어난 북한을 떠나 중국으로
한국으로 오기 전 중국에 머물러 있었다. 북한에서 나온 이유는 불의의 사고로 아버지를 여의고 기울어진 우리 집 형편에 겹친 북한의 유명했던 고난의 행군 때문이었다. 먹을 음식이 부족하여 우리는 나무껍질까지 벗겨먹으면서 배를 채워야만 하였고, 그것도 부족하여 굶는 횟수조차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이밥에 돼지고기 먹는다>고 그렇게 배우고 자랐지만, 나의 어린 시절은 늘 배고픔과 추위에 허덕여야만 하였다.
  길거리에는 많은 꽃제비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고, 점차 길가에 버려져 누워있는 어린아이들도 종종 볼 수가 있었다. 나라와 인민을 지킨다고 노래를 부르던 군인들조차도 민간의 집을 털기 시작하였고 그런 군인들은 무장된 강도와 다를 바가 없었다. 군인들은 존경에 대상에서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아버지가 안 계신 우리 집은 경제적으로 타격이 심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하시고자 여러 종류의 장사도 해보셨지만, 평생 그런 일은 해 본 적이 없으셨던 터라 장사가 잘 될 리 없었다. 힘든 삶에 도둑도 합세하여 집안에 돈이 되는 가전제품들은 다 훔쳐갔다. 이제 우리 집에 남은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어 하루 한 끼니조차도 이어나가기 힘들기 시작하였다.  

  북한 텔레비전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장군님은 허리띠를 졸라 매시고 온 국민이 발 펴고 따뜻한 방에서 잘살 수 있도록 24시간 자지도 못하시고 오늘 밤도 지새우고 계십니다."라고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많이 들었다. 하지만 북한의 경제는 나아질 기미조차 보이지 못하고 점점 어려워져 산에서 땔나무 구경조차도 어려워질 만큼 삶은 여전히 힘들었다.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의 시체, 추위에 얼어 죽어가는 아이들, 소를 잡아먹었다고 공개 처형하는 현장, 잔혹한 현장들이 계속되면서 그런 북한에서는 살 수가 없어 목숨을 부지하여 살기 위해, 어머니를 따라 두만강을 건너 중국에 나오게 되었다.

  북한에서 태어난 이유로 중국에서 사람이 아닌 유령으로 지내야만 했다. 사람으로 태어났건만, 누구도 인정해주지 않는 유령이었다. 중국 공안국에 들킬까 늘 불안과 초조한 삶을 살아야 했고, 사람들을 피해 살아야만 했으며, 집 문을 두드리는 소리조차에도 겁을 먹고 살았었다. 그런 삶이 지속될수록 인생관이 흔들렸고, 일상에 대한 작은 행복조차도 꿈꿀 수 없었다. 남들처럼 자유롭게 다니고 싶었고, 사람처럼 살고 싶었다.
  학교 갈 나이임에도 나는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아니, 친구 한명조차도 없었다. 친구를 만나면 그 친구가 어느 날 공안국에 고발하진 않을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사람 기피증까지 생겼고, 어느 누구 하나 마음 놓고 믿어본 기억이 없었다. 어머니는 아파도 중국말을 못하심으로 병원에 가지도 못하셨고, 중국인에게 사기 당해도 어떠한 조치를 취할 수도 없었다. 중국에선 북한과 달리 배는 굶지 않았지만, 자유를 보장 못 받는데 배부름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처럼 다른 사람들의 사소한 일상이 우리에게는 부러움과 꿈꾸는 희망의 대상이었다.
  
우리 탈북자들은, 북한에서 탈출한 죄로 인해 중국인의 갖은 약탈에 속수무책으로 당해야만 했으며, 아무런 반항조차도 하지 못하고 북한 감옥에 잡혀 죽어간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나라를 팔려고 탈북 한 것이 아니라, 살기위해서 왔건만 ‘나라의 반역자’라는 죄명을 씌워 정치범수용소에 갇혀서 말할 수 없는 고문과 매는 더 말할 나위 없고, 탈북으로 잡힌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음식조차도 제공해주지 않고 고된 노동을 시킨다.
  그 당시의 상황을 경험한 사람들은 “우리를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짐승보다도 못한 대접을 받으면서 지내야만 했다. 사는 것이 기적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며, 나의 삶은 점차 김일성과 김정일에 대한 배신감들이 커져 갔고, 숨어사는 중국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나약한 존재였다.

- 자유를 향한 도전
중국에서 TV로 전해지는 남한에서의 삶을 보면서, 희망을 품기 시작하였다. 암흑하기만 하던 나의 삶에도 희망을 가지고 꿈을 이룰 수 있는 자유의 땅을 보게 되었다. 브로커를 통해 목숨을 걸고 또 한 번의 인생의 도전을 시작하였다. 죽을 수도 있는 길이었고, 영원히 돌아올 수도, 갈 수도 없는 위험한 길이었다. 하지만 중국에서의 숨어 지내는 것보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해볼 만한 도전이었다.

길을 떠나 몇 개월의 고생 끝에 드디어 대한민국 인천공항에 발을 디뎠다. 비행기에 내리는 그 순간이 왜 그리 떨리었는지, 한 소녀가 첫사랑을 만나 떨리는 두근거림보다도,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을 받는 그 순간의 떨림과 두근거림보다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감동, 기쁨, 그리고 슬픔이 북받쳐지는 감정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북한에서 고통당하며 세뇌 당하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안쓰럽고 마음이 아프다. 하루빨리 통일이 되어 우리 민족이 하나가 되어 모든 이산가족들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날을 손꼽아 기다려 본다.

- 정유미(2009년 입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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