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들의 수기

    등록일 : 2012-02-02 오전 9:57:15  조회수 : 2490
  28 . 3일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1편 (김옥이)
  등록자 : 관리자        파일 :

저는 1986년 00고등 중학교를 졸업하고 구두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병에 걸려 사회보장 진단을 받고 휴식을 하던 중 1997년 1월 저녁 8시, 두만강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건너게 된 동기는 빚을 많이 지고 먹을 것이 없어 식구들이 굶고 사는 것이 딱했고 저 자신도 3일 동안이나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지내다가, 이렇게 누워서 죽기를 기다리지 말고 중국으로 가면 살 수 있다는데 나도 중국에 친척을 찾아 떠나야겠다는 생각에 목숨을 걸고 중국 땅을 밟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중국에 오면 돈이 저절로 생기는 줄로만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습니다. 힘들게 농사짓고 벌어야 만이 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연길에 있는 이모네 집으로 향했습니다. 일자리를 찾아야 했는데 그때 당시 경찰의 검문이 심하였고 중국말을 한마디도 할 수 없는 저는 일할 수 있는 곳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제일 처음 겨우 찾은 일자리가 양고기 뀀 집이었는데, 일주일정도 일하는 동안 그 식당 사장이 저를 북한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북경 어느 도시에 팔아먹으려고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팔렸으면 만 원에 팔렸을 텐데, 사장이 자리를 비운 사이 아무것도 챙기지 못하고 허겁지겁 그 가게에서 도망쳐 나와서 간신히 살아났습니다.

이틀 후에 노래방에 가면 안전하다는 이모의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삼일 째 되는 날에 노래방에 출근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제가 너무 어리고 이 세상과 중국을 적응하기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노래방 출근해서 처음으로 앉아 100원을 벌었지만 너무 값싼 웃음과 자신에 대한 민망함으로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런데 또 다음날에는 이모 친구가 남자를 소개한다고 노래방 일을 하지 말고 빨리 집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저는 차라리 잘됐다 싶어서 아예 시집이나 가서 조용히 살아보자 하고 소개팅으로 맞선을 보았습니다.

저는 그때 중국 사람이면 다 좋은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생각도 해보지 않고 결혼을 승낙 했습니다. 3월에 약혼식을 올리고 4월 제 생일날에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때 그 결혼이 저에게는 지옥이었습니다. 신랑은 결혼 첫날 옷을 입은 저를 때리고 옷을 찢어 놓았습니다. 너무 놀라고 기절할 일이었습니다. 중국 남자들은 다 좋은가 했는데 술 먹고 이런 해괴한 행동을 한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습니다. 저는 그날부터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하루 무사하고 다음날은 맞고... 이렇게 일 년을 살았습니다. 뱃속에 아이가 있었는데 뱃속에 아이를 발로 걷어차고 얼굴에 멍이 들게 때리고... 그 남자랑 일 년을 사는 동안 세 번이나 죽으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런데 제 목숨을 끊는 것 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한번은 강에 빠졌다가 나오고 한번은 파리약을 먹고 살아나고 한번은 대들보에 목을 건 것이 밧줄이 풀리면서 떨어졌습니다. 뱃속의 아이가 10개월을 채워서 세상 밖을 나오고 나서 저는 그 아이를 시집 어머니에게 맡기고 약 사러 간다고 60원을 가지고 나와서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00현으로 향했습니다.

해산 후 40일 만에 흐르는 젖을 붙들고 속으로 피눈물을 삼키면서 자신의 목숨을 위해 자신의 삶을 위해 아이를 버리고 이곳으로 도망쳐 온 것입니다. 미치고 돌아버릴 것만 같은 그때 그 시간들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농촌이라 벼 파종을 하고 있는 때였습니다. 몸 관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남의 집에 피신해 있는 것이 미안해 산후조절도 못하고 농사일을 도와주었습니다.

아이까지 버리고 남의 집 생활 3개월 만에 농촌마을에서 저는 다시 시내로 내려왔습니다. 돈을 벌어야 되겠다는 한 가지 생각만이 저를 지배했습니다. 북한에서는 먹지 못해 이제나 저제나 저를 기다리겠는데 이렇게 눈물타령이나 하고 있으면 안 되겠다 싶어서 용기를 내어 어느 가게에 들어가서 저에 대해서 설명 드리고 좋은 주인 덕에 일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열심히 일을 하던 중, 다시 중국이 복잡해지고 북한 사람을 잡아들인다고 해서 제가 있던 주인집 언니 소개로 어느 집 보모로 가게 되었습니다. 모든 집안일부터 두 늙은이의 대소변 받아내는 일까지 해야 했습니다. 그 집에서 6개월 일하는 동안 수모와 고통은 말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안전하게 돈을 벌어야한다는 생각에 모든 것을 참아내야 했습니다.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눈물이 흐르네요. 말 못할 수모를 겪으면서도 그 일을 해야 했던 20대 저의 인생이 너무 슬펐습니다.

이렇게 피 눈물 나게 번 돈을 한푼 두푼 모으던 중 59세 되는 한 남자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모은 돈으로 새 살림을 꾸리게 되었고 남자네 집에서 꾸려주는 돼지 공장을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그 집 식구들은 말을 듣지 않으면 전화 한통이면 끝장이다 라는 별의별 고통스러운 말과 협박을 다해 왔습니다.

하지만 저는 남편만 믿고 꿋꿋이 일을 열심히 해 나갔습니다. 제가 열심히 하다 보면 남편은 알아주리라 생각했거든요. 량심을 바치면 돌부처도 울겠지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돌부처가 울기는커녕 고통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국에 계시는 이모한테 전화가 왔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한국으로 갈 수만 있다면 가고 싶었는데 한국으로 오라는 전화였습니다.

이모부가 소개를 해서 한국으로 가는 길에 들어섰지만 이틀도 못되어 공안에 잡혀 도문 변방에 두 달 동안 구류되었습니다. 한국으로 가서 지금까지 잃었던 꿈을 펼치고 새로운 삶을 찾고 자유와 인권을 찾게 될 줄 알았는데 중국 경찰에 잡혀 뼈 저리는 고생을 다 했습니다.

날마다 도문 감옥은 눈물바다였습니다. 그때 저는 9일 동안 단식하면서 죽으려고까지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살아야 되겠다는 생각이 한술 두술 밥을 먹게 했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머리맡에다 감시원들의 눈을 피해 십자가를 그리고 아침 점심 저녁으로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하는 방법조차 모르는 저였지만 저는 하나님께 죄 많은 저를 용서하시고 북한으로 보내지 마시고 살려달라고 울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때 저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저만은 살 수 있을 거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두 달 거의 되는 날에 도문 변방의 차디찬 감방에서 끌려나와 대형 버스에 앉아 수쇄를 채운 채 북한으로 북송되고 말았습니다.

그 추운 날씨에 온기 하나 없는 감방 안에서 두 발도 얼구어 가면서 참고 견뎌 왔는데 인도적인 차원에서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었는데 공안은 사정없이 우리를 북송해 버렸습니다.(다음호에 계속)
                                                                                            
김옥이자매님은 현재 하나님의 은혜로 무사히 중국을 탈출하여 한국에 도착 후 하나원에서 정착 교육 중에 있습니다.
                                                                                                 - 김옥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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