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들의 수기

    등록일 : 2010-12-04 오후 8:42:02  조회수 : 3049
  23 . [퍼옴글] 뒤를 보지 말고 앞을 보자 - 전소연
  등록자 : Paull Kim        파일 :


내가 한국국민이 된지 벌써 2년이다.
참 세월이란, 이따금 뒤를 돌아보면 북에서 보낸 반생이 아픈 후회로 떠오르며
현재 나의 모습에 긍지를 느끼곤 한다.

그러나 그 긍지 속엔 늘 내 마음을 괴롭히는 어둠이 있다,
그것은 살 수 없어 떠났던 북녘마을에 내 사랑하는 아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자주 고등학교들에 강연을 나가곤 한다.
마주한 학생들을 볼 때면 잠시 두고 온 애들의 얼굴이 겹쳐 눈시울을 적시는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러던 어느 날 경기도 이천에 있는 어느 고등학교에 안보강연을 나갔는데
한 학생이 손을 들며 이런 질문을 했다.

-저 강사선생님은 왜 북한을 탈출했습니까? 분명 어머니 같은데,

전혀 예상 못했던 질문이라 일순 당황했다.
아마도 고향에 두고 온 아이들이 있다는 말을 듣고 너무 궁금한 것이 있어 던진 질문 같았다.

"말하자면 좀 긴데 괜찮겠습니까?”

내말이 떨어지자 학생들은 이구동성으로 손을 들며 들려 달라고 했다.

"여러분의 질문에는 분명 자식을 둔 어머니가 어이하여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길을 떠나 왔냐는 질책이 담겨 있는 것 같은데 맞나요?”

학생들의 눈길이 무척 진지하다.
이제 어떤 대답을 하느냐에 따라 내가 어떤 어머니가 될지 판결이 나올 것 같다.
적당히 얼버무려 그 자릴 모면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진실을 전해야 하기에 말을 꾸며낼 수가 없었다.
순진한 학생들 앞에서는 더욱 더 그렇다. 나는 마음을 다잡고 운을 뗐다.

“저에겐 두 아이가 있습니다. 오누이죠, 큰 애가 남자였는데 여러분과 비슷한 고등학교 학생이었습니다. 딸애는 초등학교에 다녔고요, 둘 다 한창 배워야 할 때였지만 배울 수 있는 여력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뜻하지 않은 사고로 아버지를 잃은 아이들에겐 당장 배움보다는 참기 어려운 굶주림을 먼저 해결해야만 했으니까요,
굶어 노랗게 변색되어 가는 아이들을 보는 어미 된 내 마음은 막 미쳐 버릴 것만 같았어요,

그 때까지 학교에서 생물과목을 가르치던 내가 국가의 식량공급이 끊기자 무엇을 어떻게 하여 애들을 먹여야 할지 도무지 방도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먹을 것을 구할 길은 아무데도 없더군요,

그렇게 얼마를 버티던 끝에 어느 날 쥐약 세 봉지를 구해 놓고 모두 저 세상으로 갈 준비를 했습니다.
깊은 밤, 벽에 붙은 벽시계의 초침소리를 들으며 홀쭉해진 배를 부여잡고 기운 없이 늘어져 버린 애들을 바라보는 내 눈에 하염없는 눈물이 흘렀습니다.

문득 작은 애가 고사리 같이 여윈 손을 들며 엄마, 경순이가 떡을 혼자 먹어, 나 좀 주라고 말해주면 안 돼? 한 개만 먹으면 나도 학교갈 수 있는데, 하며 쳐들었던 팔을 맥없이 떨어뜨렸습니다.
얼마나 먹고 싶었으면, 얼마나 학교에 가고 싶었으면, 숨이 훅 멎는 순간이었습니다.

잠자는 딸이 꿈속의 잠꼬대였지만 생과 배움을 향한 절절한 그 소원을 지켜 줄 의무가 내게 있다는 것을 절감케 한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내 손에서 툭, 쥐약봉지가 떨어져 내렸습니다. 죽기는 쉬워도 살기는 힘든 세상이었지만 쉬운 길만을 택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었기에 나는 눈물을 씻고 분연히 일어났습니다.

어떤 역경 속에서도 생물은 원초적인 목숨을 내던지기보다는 그에 한없이 집착한다는 원리를 학생들에게 가르치던 교원으로서 너무 쉽게 모든 것을 포기한 것만 같아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북한의 현실은 내가 아무리 분연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해도 어디 가서 감자 한 알 쉽게 구해 올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너무도 메말라 무리죽음이 나던 때였으니까요.

그러니 빈 손 뿐인 제가 아무리 발버둥 쳐 봐야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다시 죽음을 생각하던 그 때 독 틈에도 용수가 있다는 말처럼 천만다행으로 내게 구원의 손길이 다가 왔습니다.”


와, 박수소리가 일어났다, 가슴조이며 듣던 학생들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난다.


그래 죽음이란 어느 누구에게도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오직 살아야만, 목숨을 귀중히 여겨야만 산 자와의 인연과 뜨거운 감동이 탄생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어진 뒷말은 다시 학생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다.


내게 다가 온 구원의 손길은 다름 아닌 중국에 여자들을 팔아넘기는 거간꾼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알면서도 거절할 수 없었다.
내 한 몸 바쳐서라도 애들을 살릴 수만 있다면 지옥의 불가마인들 마다할 수 없는 것이 당시 내 처지였다.

선불로 받은 돈을 친정어머님께 맡기고 아이들을 부탁한 나는 눈물을 머금으며 두만강을 넘었다.

“여러분 그때로부터 나의 신분 없는 이국생활이 시작됐습니다. 모든 것이 낯설고 정이 안가는 생활이었지만 두고 온 애들에게 생활비를 주고 공부시킬 수 있다는 기쁨만으로도 사는 세상이 너무 고마웠습니다.”

말을 마친 내 눈에서 저도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마주보는 학생들의 눈언저리도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너무 슬픈 말을 쏟아놓은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 날 강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너무 많은 생각을 불러 오는 길이기도 했다.

달리는 차창밖엔 많은 사람들이 행보가 보였지만 어느 누구하나 그늘진 얼굴은 없었다. 모두 밝고 명랑한 모습이었다. 나도 이젠 그 당당한 대열의 한 성원이라고 생각하면 사는 것이 너무 행복했다. 언뜻 언뜻 스쳐 지나는 풍요한 조국의 모습이 돈에 팔려 동북의 이름 모를 시골로 향하던 그때의 불안하던 내 모습과 교차된다.


2만4천 위안이라는 ‘거금’에 팔린 내가 도착한 곳은 흑룡강성의 어느 시골 마을이었다. 당시 20-30세가 2만5천 위안이었는데 40을 바라보는 내 몸값이 그만하면 손해는 안 본 것 같다.

암튼 그 돈으로 애들을 구제하고 다시 학교에 보내고 난 다음이어서 마음만은 홀가분했다.

무려 10여 차례에 걸쳐 선을 본 뒤 나는 그만하면 괜찮다고 생각된 중국인 남성을 따라 그의 집에 도착했다.

선까지 보이며 마음 드는 남자를 고르라고 할 걸로 봐서는 우리를 분명 짐승처럼 물건 취급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한결 마음이 안정되었다.

시댁식구들은 하나같이 나를 반겼다. 도착한 다음날 식부터 올리고 며칠 푹 쉬라고 했다.

이제부터 내가 살 집이어서 나는 집 안팎을 돌아보았다. 흙에 삶은 얹은 전형적인 중국인 농가였다. 흙담집이어서 불결하기 그지없었다.

이부자리하나 변변한 것이 없는 뜨내기 같은 살림살이였다. 대체로 1년 수입이 1만 5천원 정도였는데 이자를 내놓고라도 5만원이 넘는 빚을 지고 있었다.

닷새 후 나는 남편과 함께 콩 수확을 나갔다. 밭에 가보니 풀이 강산 같았고 콩이 없는 빈공간이 너무 많아 큰 밭이었지만 실 경작면적은 얼마 되지 않았다.


빚지고 사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게 된 나는 다음해부터 정부 융자까지 받아 땅도 더 빌리고 인부와 비료도 충분히 마련해 억척같이 농사를 지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때 그런 힘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 알고도 남는다. 아들과 딸에게 그리고 어머니까지 돌봐야 하는 내 처지에서 돈이 나오려면 여기 시집이 잘 살아야 했다.


모두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식이 생활방식에서 벗어 못난 구태의연하고 답답한 사람들이어서 날마다 변모하는 자본 경제의 속성을 따라 못가는 형편이었다.


북한과 달리 개인농이고 일한만큼 풍성한 열매를 거둘 수 있는 이 좋은 환경에서 살아남지 못한다면 그건 게으른 본인 탓이지 남이 탓이 아니다.

모든 것을 접고 밭에서 살다시피 인부들을 채찍질하며 시장에 맞는 농작물을 경작한 결과가 풍성하게 나타났다.

3년 만에 나는 시집의 진 빚 모두를 없앴고 동네에서도 부러워하는 상급 농민의 자리를 차지했다.


비록 이국의 땅에서 말도 통하지 않는 외국남성과의 결혼 생활이었지만 내가 거둔 알찬 열매가 있어 마음은 날아갈 듯 기뻤다. 그해 어머니에게 1만 위안이라는 거금도 보냈다.

그만한 돈이면 북한에서는 부자소리를 들었다.


중국에서의 3년간의 나의 생활은 많은 변모를 가져왔다. 그것은 시대적 환경이 내게 선물한 귀중한 열매였다. 무엇을 못하랴, 24시간 전기가 들어오고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마음대로 사서 쓸 수 있는 세상, 트랙터를 소유하던 비행기를 사던 개인소유를 인정해 주고 장려해 주는 또 다른 세상, 북한과는 너무나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그제야 나는 고향이 아닌 타국의 거친 들이지만 마치 오래된 연인처럼 마주 대할 때마다 그처럼 편하고 정이 드는 원인을 알게 되었다.


역시 사람은 독자적인 선택의 존재지 구속에서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다. 비로소 세상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게 된 그때부터 나는 앞만 보고 줄 곳 달렸다. 뒤만 돌아보면 가슴지지는 아픔밖에 생각되는 것이 없다, 왜? 왜 나서 자란 조국이면서도 북한은 안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처럼 혐오하고 싶은 악몽만 남겨주는 것인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원인을 이론이 아닌 실천과정에서 알게 된 내 마음은 그때부터 북정권실세들에 대한 증오로 불탔다.

노력하면 나도 부자가 될 수 있음을 나는 이름 모를 이국의 시골 밭에서 알게 됐다.


그것도 지나온 연륜이 새겨진 고향이 아닌 팔려온 불우한 신세로 말이다.

사실 말도 통하지 않는 남성과 맞선을 보고 그 날로 그 남자의 뒤를 따라 그의 집에 들어서는 내 모습은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그건 두고 온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인간의 존엄도 권리도 송두리째 던져버린 하나의 그림자 같은 실체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머리 숙이고 들어가 산 세월이 내게 세상에 대해 눈을 띄워 주고 사람이 삶을 살아가는 데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참답게 깨우쳐 준 계기가 됐다.


이제 그곳, 돌아보기도 싫은 북녘마을이 내가 태를 묻고 자란 조국이라고 보면 지금도 허망하기 그지없다. 이제는 뒤를 보지 말고 앞만 보고 힘 있게 걸으련다.


그것이 두고 온 내 어머니, 내 아이들에게 한없이 떳떳한, 자랑스러운 딸이 되는 길임을 명심하고 말이다.


어제 반가운 소식이 왔다. 두만강을 넘은 어머니와 아이들이 걸어온 전화였다.
순간 가슴은 못 견디게 두근거리고 세상 모든 것이 그처럼 아름답게 보일수가 없었다.

내가 긍지를 가지고 사는 땅, 보다 아름다운 미래가 약속된 이 고마운 반쪽의 조국에 내 가족들도 함께 안긴다고 생각하니 눈물부터 앞섰다. 궁전 같은 배움의 전당에서 공부하는 내 아이들이 밝은 모습이 벌써부터 보인다.

거침없이 흘러내린 내 눈물, 그것은 지난날의 아픈 슬픔을 딛고 찾아낸 고마움의 눈물이며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한 눈물이다.





잡지 북녘마을제8호에서 전재 -지월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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