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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일 : 2017-07-07 오전 10:43:09  조회수 : 392
  2420 . [혜산 새색시] 이나은의 김영옥 님 인터뷰
  등록자 : HAFS12人        파일 :

혜산 새색시

김영옥은 올해로 30세가 되고, 한 달 전에 자신과 같은 북한 이탈 주민과 막 결혼을 한 새색시였습니다. 영옥 님에게 5년이라는 세월은 남한의 문화와 언어에 적응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인터뷰 내내 남한 말과 외래어를 구사하며, 구체적으로 자신이 경험했던 것들을 설명해주신 영옥 님의 얼굴에는 선한 웃음이 떠나지를 않았습니다.

중국과 북한의 경계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혜산시에서 나고 자란 영옥 님은, 보육원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잃고 들어가게 된 보육원에서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하루하루 살아갔습니다. 학교도 소학교(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는 일반 학교에 다니다가, 그 후부터 근처 고아들이 모여 있는 학교로 옮겨 나머지 8년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북한의 소학교는 8시부터 12시까지, 중고등학교는 8시부터 4시까지가 수업 시간이었습니다. 12시부터 2시까지는 점심시간 나머지 시간은 수업했습니다. 한 반에는 40~50명 정도가 함께 생활했고 남녀 비율은 비슷했습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국어나 수학 같은 과목들을 배웠지만 특이하게 소학교에서 자연이라는 풀의 종류를 배우고, 주변에 사는 생물들에 대해서 배우는 과목도 있었습니다.

전체 적인 학교의 분위기는 몇 십 년 전의 남한 학교와 비슷했습니다. 선생님들은 무섭고 엄하셨으며, 숙제해 가지 않거나 벌을 받아야 할 때는 체벌을 가했습니다. 규정과 규율이 워낙 심하고 엄했기에 반항하는 학생들은 찾아볼 수 없었으며, 선생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문제아라는 게 게 있을 수가 없었어요. 워낙 무섭게 혼내셔서 선생님의 명령을 거역할 용기를 가진 친구들이 없었거든요.” 이러한 엄격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한국학교 학생들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습니다. 영옥 님도 학교에서 무리를 지어 다니거나 단짝 친구와 같이 어울려 놀곤 했답니다.

수업이 끝나면 바로 보육원으로 돌아와 집안일을 돕고, 물 길어 가는 일을 도맡아 했습니다. 돈이 많은 집 아이들은 과외를 받거나 아코디언을 배우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었지만, 그러기에는 영옥 님의 생활은 너무나도 빈곤했습니다. 정부에서 지원해주는 부족한 자금으로 생활하고 지원받은 교재의 개수도 부족해서 까마득한 선배들의 다 해진 교과서를 물려받아 어렵게 공부를 이어 나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영옥 님에게 과외나 악기를 배우는 것은 정말 꿈만 꿀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10년의 학교생활이 끝나자 영옥 님은 돌격대에 들어가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돌격대는 도로 공사나 집 짓기 등 다양한 노동을 무보수로 하는 집단인데, 이 집단에는 그녀와 같은 고아 출신들도 들어가지만, 일반 사람들도 3년만 돌격대에서 일하면 당원이 된다는 말에 자진해서 들어가서 일하기도 합니다. 그녀는 이 일을 하면서 생계를 이어 나가던 중, 자신의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보기 시작했습니다. 언제까지나 돌격대에서만 지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고아 출신에다 북한에서 쌓아놓은게 별로 없으니 잃을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개척해 나가고 싶었고, 그것이 그녀가 북한을 떠나기로 한 궁극적인 계기였습니다. 중국으로 넘어가는 데에 성공한 영옥 님은, 중국에서 집주인의 일을 도와주고 허드렛일을 하면서 돈을 벌었습니다. 그러나 신분증이 없어서 편안한 삶을 살 수가 없었습니다. 불법 체류자로 적발될까 봐 거리에서도 제대로 돌아다니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불안한 나날을 보내다 그녀는 태국을 거쳐 겨우 남한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신분증이 나오잖아요!

왜 다른 나라 말고 남한을 선택하게 된 거예요?”라고 질문을 던지자 당연하다는 말투로 신분증이 나오잖아요.” 라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탈북한 사람들을 시민으로 받아주고, 법적으로 안정적인 삶을 보장해주는 나라는 남한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나라에서 영옥 님과 같은 사람들은 그저 불법 체류자고, 언제 적발돼 어려움에 부닥칠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녀는 선택의 여지없이 남한으로 들어와 터전을 잡게 된 것입니다. 그녀의 예상대로 남한에서의 삶은 다른 나라에서의 삶과는 달랐습니다. 신분증이 발급되고 정식으로 시민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되어 다른 나라에서보다 떳떳하게 살 수 있었던 점도 좋았지만 그녀는 천기원 목사님을 만나 구출되지 않았다면, 자신이 이렇게 남한에 잘 적응할 수 있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자신에게 기꺼이 손을 내밀어주고 다양한 방면에서 가장 큰 도움을 준 감사한 분이 바로 천기원 목사님이자 두리하나 국제학교의 교장 선생님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기독교는 영옥 님이 생전 처음으로 접한 새로운 종교였습니다. 그전까지 그녀에게 허락된 유일한 신적인 존재는 김일성, 김정일, 그리고 김정은이었고, 다른 종교를 가지거나 다른 우상을 섬기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도 다른 북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어렸을 때부터 그들을 신봉해야 한다는 교육을 받았습니다, 북한의 주체사상과 유일사상에 대한 교육은 그녀가 유치원에 다닐 때부터 이루어졌으며, 김 씨 일가에 대한 조건 없는 신념을 지니도록 강요받았습니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그들의 생년월일이나 사건이 일어난 날짜까지 모두 다 완벽히 외우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였습니다. 북한에서 김 씨 삼부자는 누구도 감히 비판할 수 없는 신성한 유일신이었습니다.

지난 25년간 이런 삶을 살아온 영옥 님이 이런 사상을 버리고 기독교를 믿게 되는 데에는 목사님의 베풂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일단 자신을 어려움에서 구출해주셨다는 점에도 감사드리고, 그 외에도 자신이 남한에서 다양한 목표를 이룰 수 있게 전적으로 도와주신 점에도 크게 감사드렸습니다. 이런 목사님의 은혜를 입고 하나님이라는 신을 믿게 되고, 모든 일에 감사하며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영옥 님은 기독교에 더 자세히 알기 위해 성경도 공부했고, 현재도 교회에도 주기적으로 다니며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말하며 독실한 기독교 신자의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목사님을 통해 기독교를 알게 된 것만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비록 몇 년간 생계로 인해 학업을 놓고 있었지만 기회가 되면 교육을 더 받고 싶다는 학구적인 열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옥 님은 생활이 안정화된 후에는 대학진학을 목표로 삼게 되었습니다. 대학 진학을 위해 검정고시나 준비할 서류 등에서 도움을 얻은 곳이 바로 이 두리하나 국제학교였습니다. 대학 입학이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단계별로 하나씩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주고, 몰랐던 부분에 많은 도움을 주신 분이 이 학교 선생님들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도움을 받아 열심히 노력한 덕에 결국 원하는 대학, 원하는 학과인 사회복지과에 입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교장 선생님으로 재직하고 계시는 이 두리하나 국제학교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주방 가사 일을 돕게 된 것도 목사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보답하고 싶었기 때문이랍니다.

영옥 님은 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합니다. 비록 신혼생활때문에 잠시 휴학을 하고 있지만 그녀는 학교에 돌아가게 된다면 제대로 사회복지학을 배워 사회복지사가 되고 싶어 합니다. 자신도 지금까지 어려운 상황을 많이 겪어봤고 아픔을 느껴봤으니, 다른 어려운 사람들을 더욱 진심으로 정성껏 대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입니다. 하지만 마냥 행복할 것만 같던 대학 생활에도 어려움은 있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완벽히 없어지지 않는 특이한 억양이 문제였는지 아니면 다른 대학생들보다 상대적으로 많은 나이가 문제였는지 친구 사귀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대인관계 문제보다 학과 공부는 훨씬 쉬웠습니다. 대인관계 문제는 단시간에 해결하지 못할 문제라며 마음 아파했습니다. 북한과 남한의 문화차이가 너무 심해서 생기는 문제인 것 같다는 말을 덧붙이며 쓴웃음을 짓기도 했습니다. 남한 사람들과 어울리기 힘들며, 자신 또래의 남한 친구를 사귀어본 적이 없다는 말에 만약 통일된다면 남한과 북한이 잘 어우러져 살 수 있을 것 같으신가요?”라는 질문을 던졌는데, 인상적인 답이 나왔습니다.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이 통일을 원하기 때문에 언젠가는 통일이 될 것이지만, 실질적인 차이점 때문에 힘든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라는 답이었습니다.

영옥님은 북한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통일에 대한 생각을 말했습니다. 북한에서는 남한 사람들을 한민족이라고 생각하고 염원하고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 남한 사람과 북한 사람을 한 공동체로 생각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약간 혼란스러워서 그러면 왜 북한은 한국을 위협하느냐고 물어보았더니 북한에서는 미국과 한국에 상주하고 있는 미군을 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남한에 미사일을 날리며 위협을 가하는 북한의 적대심은 우리를 향한 것이 아니라 미국을 향한 것이랍니다. 영옥님도 학교에서-한국에서 미국을 몰아내야 우리가 통일할 수 있다고 배웠다고 털어 놨습니다.

물론 만약 통일된다면, 자신이 북한 이탈주민으로서 현재 겪고 있는 문제를 북한 사람들도 겪을 수 있다는 것이 영옥님이 꼽은 가장 큰 문제점이었습니다. 65년간의 분단은 남한과 북한이 다른 문화를 형성하고 발전시킬 수 있었던 긴 시간이었습니다. 그 긴 시간으로 인해 생기는 문화적 언어적 차이점은 우리가 함께 넘어야 할 장벽이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남한과 북한의 경제적 차이를 좁히는 것도 풀어야 할 문제라고 덧붙였습니다.

긴 인터뷰가 끝난 후 열심히 답해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고 잠깐 가벼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진지한 인터뷰 중 궁금증을 느꼈던 부분들을 위주로 말을 했습니다. 취미를 물어보니 남한에 와서 새로운 취미를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원래는 요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한국에 와서는 다양한 음식을 접하고 요리하는 것에 관심을 가져 계속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영화나 음악도 관심이 있지만, 아직 많이 접하지 못했다며 결혼하고 여유가 생긴 지금, 이런 문화를 더 많이 즐길 계획이라고 했습니다.

영옥 님도 제가 몇 살이고 어떤 걸 공부하고 있는지 궁금해 했습니다. 저는 고등학생이라는 말을 했고, 저널리즘과 과학을 공부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기사만을 주로 써왔기 때문에, 이렇게 정식으로 누군가와 인터뷰를 진행하고 온전히 그 인터뷰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누군가와 인터뷰를 하는 일은 정말 신기하고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만난 첫 북한 이탈 주민, 첫 인터뷰가 영옥님이였던 건 정말 크나큰 행운이었습니다. 서툰 질문에도 친절히 답변해주셨고, 답하기 껄끄러우실 것 같다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물어본 것들도 아무렇지 않게 자세하게 이야기를 풀어주셨기에, 첫 인터뷰가 편안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던 경험들을 직접 겪고 견뎌내신 분을 인터뷰하게 되어 정말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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