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마당

    등록일 : 2016-09-19 오후 4:44:05  조회수 : 4328
  2285 . 은은한 삶의 향기와 빛깔이 있는 2010년 인물 33인
  등록자 : 한국인물연구원        파일 :

프롤로그

천기원 목사는 탈북자의 대부로 불린다. 지난 1999년부터 2016현재 1,100여 명의 탈북자를 한국을 비롯해 미국, 일본, 유럽 등에 망명시켜 자유를 찾아줬기 때문이다. 그는 탈북자들의 주요 탈출로로 불리는 캄보디아 루트(중국->베트남)와 몽골 루트를 개척했고, 8개월 동안 內蒙古감옥에서 혹독한 옥살이를 했다. 이 시대 이 민족의 아픔을 함께 한 인물로 김동건의 한국 한국인등 언론을 통해 조명을 받았다. 현재 ()두리하나 이사장, 통일 이후를 대비한 기숙형 대안학교인 두리하나국제학교교장, ‘두리하나교회담임목사이며, 탈북자들의 지원단체인 두리하나선교회두리하나공동체를 운영하고 있다. 앞으로 천 목사의 꿈은 5000명이 넘는 탈북자들이 공동 거주할 통일동산을 설립하는 것이다. 감옥에서 취조를 담당했던 중국 검사는 그의 신앙에 감복하기도 했다. 그 검사는 천 목사의 사위가 됐다. 이 같은 천 목사의 지나온 발자취를 추억했다.


탈북자를 탈출시키다 영하 50도 오르내리는 중국 변방 퉁치감옥에서 옥살이(8개월)


막다른 골목에서 만난 신학

천기원 목사는 경상북도 송림동 오지마을 가난한 농가에서 3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열 아홉 살에 부모를 모두 여의고 고아 아닌 고아가 되었다. ‘아메리칸 드림에 관한 책을 보다가 미국에 가서 돈을 벌고 싶어 칵테일학원에 등록한 것이 계기가 되어 호텔리어로 취직을 하여 5년 만에 매니저로 초고속 승진했다. 돈도 많이 벌었다. 국내서 처음 생산된 자가용을 타고 다니며 스스로 호텔의 VIP 고객들과 같은 신분으로 착각해 돈을 펑펑 낭비했던 시절이다. 1989년 서울시에서 제정한 제1회 호텔 우수종사원 표창까지 받으며 거침없이 승승장구하던 그는 마침내 오너로 나섰다. 그런데 손을 대는 사업마다 실패했다. 사업의 입지적 조건이나 시장조사를 따져보면 실패할 까닭이 없었지만 시작하는 사업마다 실패는 이어졌다. 마지막으로 중국까지 들어 가봤지만 아무런 소득 없이 돌아왔다. 헤어나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었고 쌓이는 것은 빚이었다. 집도 날리고 자신뿐 아니라 친척과 친구들까지 다 빚 더미에 앉게 만들었다. 절망 속으로 빠진 천 목사는 자살을 생각했다. 수면제를 모으기 시작했지만 모태신앙인 천 목사는 자살은 죄가 된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그의 발걸음은 다시 교회로 향했다. 하나님께 도와 달라고 통사정하며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어느 목사님의 간증 테이프를 듣게 됐다. 문득 그 목사님을 만나면 자신의 불행이 마치리란 예감이 들었다. 그분은 부천 송내중앙감리교회 김종순 목사님이다. 김 목사님은 천 목사가 다니던 교회에서 부흥회를 하게 됐다. 그는 자청해서 김 목사님을 모시는 일을 담당했다. 첫날 집회를 마치고 차를 운전해 숙소로 가는 길. 김 목사님이 그를 나직이 불렀다. 집사님, 혹시 목회할 생각 없으세요?” 자신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는, 생전 처음 본 김 목사님이다. 아니요, 난 목회할 생각이 없습니다.” 너무나 단호한 대답에 김 목사님은 목사에게서 눈길을 거두고 창밖을 보시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셨다. 집사님은 꼭 목회를 하셔야 하는데” “아니요, 나는 장로는 몰라도 목사가 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사실 천 목사의 어머니께서는 막내가 목회자의 길을 가기를 소원하며 기도하셨지만, 어린 소년의 눈에 비친 시골 목사님의 모습은 가난하고 초라한 삶으로 비쳐졌고, 목사님의 아들이 친구였기에 목사관에서 늘 함께 놀곤 했었는데, 어느 날 장로님과 의견충돌로 갑자기 떠나가시는 목사님과 친구의 모습을 바라보며 목사님보다 더 높을 것 같은 장로님이 되고파 했다.

김 목사님은 3일 집회기간 동안 시간마다 목회자의 길을 가야한다고 목사를 일으켜 세웠고 마지막 날 집회를 마무리 하면서 집사님은 꼭 목회를 해야 합니다. 목회를 하지 않으면 하나님에게 죄 짓게 됩니다.”라는 말씀을 남기고 떠나셨고, 목사는 전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눈만 감으면 김 목사님의 말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는 보름동안 고민했다. 그리고 김 목사님을 찾아갔다. 저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시고 또 저를 위해 얼마나 기도하셨기에 그러신지 모르겠으나, 저도 기도원에 가서 일주일 동안 금식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찾을 테니 목사님께서도 나를 위해 특별 기도를 해주십시오, 내가 과연 목사의 그릇이 되는지.”

그리고 그날 바로 오산리 금식기도원을 찾아갔다. 그리고 하나님께 따지듯 나는 목회자의 사명이 없는데 왜 다른 사람을 통해 목사 하라고 하는 겁니까? 사명도 없이 목사를 했다가 나중에 하나님께서 나는 너를 부른 적이 없다고 하시면 나는 어떻게 됩니까?”라며 하나님이 직접 목소리를 들려주시든지 눈에 보이는 증거를 보여 주시라며 간절히 매달렸다. 하지만 기도할수록 이성적으로는 이 길은 아니라는 확신만 들었다. 결국 금식기도 3일 만에 아무런 응답도 없이 허탈한 마음으로 내려와 김 목사님을 찾아갔다. 그는 물었다.목사님, 하나님께서 뭐라 하시던가요?” “뭐라고 하긴. 목회 하라지 이것이 답이었다. 그는 다시 고민에 빠졌다. ‘만약 정말 하나님이 나를 주님의 종으로 불렀다면 나이가 60이 넘어도 내가 목사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때 단양에서 큰 술집을 경영하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루아침에 모든 것 버리고 김 목사님의 제자로 훌륭한 목회자가 된 장경우 목사님이 생각나서 그분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는 도저히 목회자가 될 자질이 없는 사람인데 왜 김 목사님은 남의 사정도 모르시면서 목회자가 되라고 하시는지 모르겠다고 투덜거렸다. 장 목사님은 말했다. 집사님, 사람이 보기에 아무 쓸모없고 형편없는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택하여 쓰십니다.” 그는 장 목사님의 답이 자신을 무시하는 말이라 생각하고 전화를 끊었다. 자신이 쓰레기통에 버려진 휴지처럼 여겨졌다.

그날 밤, 가지고 있던 수면제를 꺼내놓고 내가 자살하더라도 하나님, 내 사정 알지 않습니까. 지옥은 안 가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불쌍한 아이들을 위해서도 기도를 했다. 그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갑자기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내가 너 같은 아무 보잘 것 없는 것을 쓰려고 시련을 주었던 것인데, 너는 왜 그걸 모르느냐.’ 깜짝 놀랐다. 그리고 깨달았다. ‘지식 있고, 깨끗하고, 힘이 있다고 해서 목회자가 되는 게 아니다. 목회자는 소명을 깨닫고 부름에 순종만 하면 된다. 종이 뭐냐. 종은 주인이 시키는 대로 복종만 하면 된다. 내 자신이 능력이 있거나 똑똑하기보다 오직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충성하면 되지 않느냐.’

그는 밤을 새워 눈물로 회개하며 기도를 했다. 다음날 김 종순 목사님을 찾아가 자청하여 목회자가 되기 위한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신학교에 들어갔다. 물러날 곳도 없었던 그는 자신을 낮추고 비우는 단련의 시간으로 여기며 어떤 힘든 일이라도 감내할 각오를 했다. 김 목사님께서 집회에 가시면 거기가 어디든 가방을 들고 따라다녔다. 김 목사님은 혹독하게 훈련을 시키면서도 작은 것 하나까지 챙겨 주시고 끝없는 사랑으로 가르치고 감싸주시는 분이셨다. 전국, 전 세계를 무대로 부흥회에 다니시는 목사님을 따라다니랴, 학교 다니랴, 교회 일 하랴, 하루에 3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었다. 과로로 세수만 하면 코피가 쏟아졌다. 그 와중에도 빚쟁이들이 교회로 계속 찾아왔다. 결국 2년 만에 김 목사님 곁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천 목사가 중국에서 선교하다 추방되어 한국에 돌아왔을 때 김 목사님은 다시 그를 불러 따뜻하게 맞아주었고, 지금은 목회와 인생의 스승이자 영의 아버지로 누구보다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목사의 넉넉한 울타리가 되어주고 있다.


중국에서 떠도는 탈북자 참상을 보고 두리하나선교회 설립

천 목사는 김진홍 목사님의 영향으로 19997월에 북한선교의 비전을 품고 중국 단기 선교를 갈 기회를 갖게 됐다. 목사가 처음 탈북자를 본 것은 9512월경 사업상 중국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도문에서 훈춘으로 가는 길에 두만강 얼음에 잠겨 죽어있던 탈북자의 시신과 훈춘에서 팔려가던 10대의 어린 북한소녀, 구걸하다 매 맞던 북한 고아들의 모습을 목격했다. 같은 민족으로서 너무나 아픈 장면을 보았다. 때문에 다시는 중국에 오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었는데, 이번에도 그 장면들보다 더 악화된 3개의 똑 같은 장면을 또 보게 되었다. 그가 연길공항에 도착하자 북한에서 부모 잃고 먹을 것을 찾아 중국으로 온 고아(일명: 꽃제비)들이 도와 달라며 달려왔다. 손바닥에 동전 몇 닢을 건네주자 갑자기 공안이 나타나 꽃제비들을 곤봉으로 때리면서 끌고 갔다. 곤봉으로 맞은 아이의 귀가 찢어져 피가 나는 걸 보고 마음이 아팠다. 두만강은 여름이라 강물이 많이 불어있었는데, 강 건너편에서 시체 2구가 이쪽으로 밀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탈북자였다. 그때 받은 충격이 너무 컸다. 도문 역에서는 탈북 여성들이 강제로 차에 실려서 팔려 가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 짐승만도 못한 인생들이었다. 중국을 다녀온 천 목사는 홈페이지를 통해 이 실상을 알리기 시작했다. 홈페이지 명은 에스겔 3717에 나오는 둘이 하나가 되리라는 성경말씀을 따 두리하나라고 했다. 회원이 한둘씩 늘어나면서 모임이 결성됐다. 사명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체계적으로 탈북자들을 돕기 시작했다. 199912월 초기 회원 7명이 중국으로 들어가 거리를 돌아다니는 꽃제비들 5명을 모아 방을 하나 얻어주기도 하고, 집을 한 채 얻어 쉼터를 만들어 나가자 탈북자의 수는 금세 10명에서 20명으로 늘어났다. 당시 탈북자들이 많았지만 그들을 돕기가 쉽지 않았다. 남북은 화해차원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 북한을 방문하던 때였기 때문이다.


목숨을 걸고 탈북자
2명 구출, 최초 캄보디아 탈출로 개척

천 목사가 탈북자 구출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된 건 한 탈북 청년 때문이었다.두리하나 첫 모임에 협성신학에 다닌다는 키가 자그마한 19세의 탈북청년이 기도를 요청해온 것. 아버지가 굶어서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중국으로 탈출했지만 어머니와 헤어져 혼자 한국으로 왔는데, 그날 엄마가 중국 공안에 붙들려갔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고 했다. 청년은 엄마가 북한으로 끌려가지 않고 무사히 풀려 나도록 기도를 해 달라고 부탁했다. 두리하나 첫 기도모임에서 회원들은 밤새 기도를 했고 이틀 후에 엄마가 풀려 났다. 엄마 때문에 아파하며 힘들어 하는 청년을 지켜보던 천 목사는 여름방학 때 무조건 엄마를 데리러 가기로 약속을 했다. 또 한 사람이 같이 가기를 원했다. 16세 딸을 중국에 남기고 홀로 홍콩을 통해 한국으로 온 탈북자였다. 그 딸을 데리고 오고 싶다고 했다. 사전 지식도 계획도 없이 무작정 중국으로 들어간 천 목사는 수소문 끝에 중국 국경을 넘어 베트남을 경유, 캄보디아를 통해 들어 올 수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 정보를 근거로 베트남으로 갈 길을 모색하다가 일단 가장 가까운 곳을 통해 탈출구를 찾기로 하고 난닝으로 향하는 기차를 탔다. 검문소 세 개를 어렵게 통과한 뒤 난닝 국경에 도착했다. 국경을 넘는 길은 너무나 어려웠다. 통과할 만한 곳엔 모두 검문소가 위치했다. 검문이 덜한 곳엔 어김없이 정글이 있었다. 이틀 동안 탈출구를 찾아 헤맨 끝에 그리 넓지 않은 마당을 발견했다. 마당을 건너 다시 벽돌담을 타고 올라가서 정글 속으로 들어갔다. 그 넓은 마당이 공안국이었다는 것은 뒤늦게 알았다. 담을 넘기 바로 전에야 마당 입구 왼쪽에서 늉야공안국이라고 쓰인 간판을 발견한 것이다. 이처럼 낮밤을 쉬지 않고 정글과 공안국을 헤매고 베트남에 도착하니 온 몸이 피투성이다. 피를 닦고 오토바이로 갈아타고 2시간을 달려 하노이행 택시를 잡아탔다. 다시 8시간이 걸렸다. 어디로 왔느냐고 운전기사가 물었다. ‘늉야공안국 안마당을 질러 산을 넘었다.’고 하자 그는 믿지 않았다. 경찰서 안마당을 가로 질렀다는 것도 믿지 않았지만 그곳 경비가 비교적 소홀한 것은 바로 그곳 정글에 코브라가 집단적으로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 코브라들은 우기에 더 왕성한 활동을 하는데 그때가 우기였기에 그 기사는 끝까지 믿지 않았다.

하노이에 도착해 한국대사관을 찾았더니 받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캄보디아로 밀입국하라고 했다. 캄보디아로 가려면 다시 사이공으로 기차를 타고 이틀을 내려가야 했다. 사이공에서 다시 캄보디아 국경을 넘어가기 위해 묵빠이 삼거리에서 메콩 강 위로 놓인 다리를 넘어가야 했다. 그런데 그곳엔 검문소가 있어 갈 수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강물을 건너야 하는데 우기 철이라 비가 많이 내려 강을 건널 수 없었다. 교묘하게 다리 오른쪽으로 2시와 3시 방향에 넓은 벌판이 있었다. 그곳은 검문소가 없었다.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이 오로지 밤이 되길 기다렸다. 비교적 쉽게 그곳을 넘었다. 배와 차를 갈아타며 프놈펜에 도착해서 대사관에 인계하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동안 짊어졌던 무거운 짐을 벗는 회한의 눈물이었다. 탈북자들은 국정원의 조사를 받았다. 탈출경로에 대해 진술서를 작성할 때 또 한 번 아연실색을 했다. 베트남에서 캄보디아 국경을 넘을 때 묵바위 삼거리에서 2시와 3시 방향으로 넘어왔다고 하자 거짓말하지 말라고 화를 냈다. 그곳을 넘을 때 간판을 못 봤느냐고 했다. 못 보았다고 하자 그곳이 지뢰밭이라는 것이었다. 때문에 그곳에는 검문소가 없었다는 걸 알게 됐다. 결국 공안국과 정글과 코브라굴과 지뢰밭을 거쳐 20일 동안 사투를 벌이다 프놈펜에 도착한 것이다. 이것은 기적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지켜주시지 않았다면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고 감사 기도를 했다.

이것을 시작으로 천 목사는 지금까지 1,100여 명을 한국으로 데려왔다. 하나님은 그가 탈북자를 탈출시키는 사건 사건마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으로 만들었다. 그 넓은 중국대륙을 빠져 나와 베트남을 거쳐 캄보디아로 가는 루트는 변함없다. 정글을 헤치고,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하나님의 지켜주심을 믿고 자유를 찾아줄 뿐이다.


非法越境者
방조죄로 영하 50도 오르내리는 중국 변방 퉁치감옥에서 8개월

천 목사가 탈북자들의 中國 密出國을 지원한 혐의로 중국 공안당국에 체포된 것은 20011229. 목사는 이에 앞서 1224일 북한을 탈출해 한국으로 망명하기를 희망하는 북한 주민 12명을 蒙古를 거쳐 입국시킨다는 계획하에 이들과 함께 중국 吉林省 延吉을 출발, 기차와 버스를 이용해 하얼빈하이라얼을 거쳐 중국과 몽골의 접경지역에 있는 내몽골자치주 퉁치에 도착했다. 이 당시 천 목사 일행은 탈북을 도와 준 세 명을 포함해 모두 16명이었다. 그런데 이들을 수상히 여긴 유목민의 신고로 공안당국에 붙잡혀 퉁치 감옥에 수감됐다. 세 명은 각각 다른 방에서 중국 죄수 7명과 함께 수감되어 감방이 좁아 칼 잠을 자야 했고 엄청난 추위는 견디기 힘들었다. 식사라고는 아침, 저녁에 주어지는 만두소(饅頭-)가 없는 주먹만 한 만두 하나가 전부. 퉁치 감옥에 있는 동안 공안원과 관계자 등으로부터 중국에 왜 왔느냐”, “왜 탈북자들을 불법으로 빼돌리려 했느냐는 등 질문만 반복했다. 목사는 125일 퉁치 감옥에서 역시 내몽골자치구인 하이라얼 감옥으로 이송 됐다. 돈이면 살인자도 풀려나는 곳이 감옥이다. 목사는 일행 중 목사 자신은 주범이지만 나머지 두 명은 죄가 없기 때문에 풀어 달라. 만약 풀어 주지 않으면 풀어 줄 때까지 금식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결국 금식 7일 만에 두 명(프리랜서 작가와 한국국적 탈북 귀순자)이 벌금 5만 위안씩을 내고 석방됐다. 천 목사는 재판 진행 도중, 변호사로부터 선처를 해달라는 한국 정부의 서류가 있으면 재판을 유리하게 진행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얘기를 들었다. 한국대사관에 부탁을 했다. 하지만 대사관은 묵묵부답.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출애굽기 2222)

검찰 조사는 목적과 배후에 초점을 뒀다. 천 목사는 한결같이 대답했다.하나님의 가르침에 따라 했다.” 성경을 모르는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게 7개월이 흘렀고, 미국 상하의원의 석방결의안이 압력으로 작용되어 재판에 회부됐다. 검사 세 명이 들어왔다. 그 중 젊은 검사 하나가 진짜로 목적이 무엇이며 누가 시켜서 했느냐.’고 물었다. 답변은 변함없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다 그러냐?” “그렇다.” 그는 갑자기 유어 굿맨이라고 했다. 일주일 후 그가 다시 와서 또 물었다.성경 어디에 탈북자를 도우라는 이야기가 있습니까?” “출애굽기 2221~22절에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라는 구절이 있다. 당신들이 배고파 넘어온 그들을 난민으로 인정하지 않고 체포하여 북한으로 돌려보내는데, 그들이 북송되면 처절한 고통 속에 죽어 가는데 그런 고통보다는 차라리 중국에 남아 팔려가거나 불이익을 당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며 숨어 사는데, 그 사람들 배가 고파 중국에 넘어오지 않았느냐? 그들을 불법입국자라고 붙잡아서 팔기 때문에 가족들이 다 흩어진다. 남편이 보는 앞에서 아내를 빼앗기고 나그네로 과부로, 부모가 보는 앞에서 딸들이 팔려가 고아가 된다. 하나님은 이런 것을 싫어하신다.” 검사의 표정이 변했다. 나도 성경을 볼 수 있습니까?” “당신도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탈북자를 구속할 게 아니라 도와주십시오.” 그동안 조사해보니 돈을 받은 것도 아니고 순수한 그 마음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나는 현역 검사라서 당신을 도와주지 못해 미안합니다. 행운을 빕니다. 유어 굿맨.” 일주일 후 재판날짜가 잡혔다. 변호사가 찾아와 돈을 쓰지 않으면 무기징역이나 사형에 처해질 수 있다.’고 협박했다. 그때 이미 김진홍 목사님께서 목사의 석방운동을 펼치기 위해 적잖은 금액을 모아 보내주셨다. 천 목사는 돈을 쓰더라도 빨리 석방되어 더 많은 탈북자들을 구출하고 싶었다. 그러나 기도의 응답은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117)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불의함도 없으시고 치우침도 없으시고 뇌물을 받는 일도 없으시니라(대하 197)라는 성경말씀이었다. 한 마디로 재판의 결과는 하나님 소관이시니 뇌물을 쓰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는 하나님에게 매달렸다. 영하 50도를 오르내리는 이 혹한은 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갇혀 있어서는 하나님 종으로서 할 일을 못하잖습니까. 이건 참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응답은 같았다.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까 절대로 뇌물을 주지 말라.’ 3일 동안 몸부림치며 하나님에게 따지듯 매달려도 보았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순간 죽든지 살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천 목사는 부인에게 편지를 썼다. 하나님에게 받은 말씀이 있으니 나에게는 1원도 쓰지 마라. 같이 잡혀있는 친구는 내가 시켜서 한 것이니까. 그 친구의 의사는 물어보고 해달라는 대로 해주어라.” 그런데 그 친구는 돈을 쓰기를 원한다는 것이었다. 피를 말리는 기다림 끝에 판결문이 내려왔다. ‘비록 경제적 이익을 획득하기 위하여 저지른 행위는 아니나, 중화 인민 공화국의 법률을 무시하고 사람들을 조직해 중화 인민 공화국의 국경을 불법 월경시켰을 뿐 아니라, 수차례 많은 인원을 불법 월경시킴으로써 중화 인민 공화국의 국경관리질서를 크게 훼손시켰다.’ 이른바 중죄였다. 그런데 뜻밖으로 최종 결과는 달랐다. 천 목사는 벌금 8백만 원에 추방이 나왔고 돈을 쓴 그 친구는 실형을 받고 감옥에 갇힌 것이다.


사형을 시키겠다는 담당 검사를 사위로

2002815일에 추방되어 한국에 왔는데 200312월 중국에서 전화 한통이 왔다. 조사를 맡았던 젊은 검사였다. 웬일이냐?” “한국에 한번 가고 싶은데 놀러가도 됩니까?” 전화를 끊고 나서 기분이 묘했다. 그는 심성이 선했고 또 외국공부를 많이 하여 아주 합리적이었다. 그의 아버지도 현직 부장검사였다. 그가 온 날은 토요일이었다. 다음 날 아침 교회로 가려는데 그가 따라나섰다. 너 현직 공산당 검사가 교회 가면 어떻게 되는지 아느냐?” 공산당원이 교회가면 감옥에 간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상관없습니다.” 그는 신기하게도 하나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도 같이 열심히 설교도 듣고 기도도 했다. 하나님이 이 친구를 여기까지 데려온 데는 어떤 계획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김진홍 목사님의 안수기도까지 받고 예수를 영접했다. 그리고 일주일간 천 목사 집에서 머물다 출국했다. 그로부터 몇 개월 후, 또 전화가 왔다. 뉴질랜드 유학을 가고 싶은데 아는 사람이 없으니 소개 좀 해주면 좋겠습니다.” 그러겠노라 하고 전화를 끊었다가 다시 전화를 했다. 뉴질랜드보다 한국으로 유학 오면 어떠냐?” “가고 싶은데 길이 없잖아요.” “그러면 내가 초청장을 해주겠다.” 그는 6월부터 천 목사 집에 와서 고려대 대학원을 다녔다. 교회도 열심히 다녔다. 그해 8월 베이징에서 대학을 다니는 천 목사의 딸이 방학을 맞아 집에 왔다. 자연스럽게 둘이 친하게 지내다 북경으로 돌아간 다음날 천 목사에게 그가 의논할 게 있다고 했다. 잠시 머뭇거리더니 의외의 말을 했다. 한나하고 결혼하고 싶습니다.” 일언지하에 안 된다고 거절했다.한나는 어려서부터 목회자와 결혼하기로 하나님께 서원했기 때문에 넌 안 된다.” “방법이 없습니까?” “방법은 네가 찾아봐라.” “제가 목사가 되면 되지 않습니까?” 그는 고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연세대 신학대에 다닌다는 조건으로 2006930, 김종순 목사님의 주례로 결혼을 했다. 결혼식 날 한국대학생선교회김준곤 목사님이 죄수와 검사의 만남이라는 제목으로 축사를 했다. 천 목사는 답사에서 보란 듯 말했다.사위가 신학교에 가기로 해서 결혼을 허락했습니다. 그런데, 신학을 하지 않고 돈을 많이 벌어 나를 돕겠다고 하는데 사위가 직장에서 잘리고, 하는 사업마다 망하게 해달라고 여러분은 기도를 해주십시오.” 그의 말에 모두가 웃으며 박수를 쳤다.


두리하나국제학교
(DIS) 설립

1999년에 설립된 ()두리하나는 미국과 일본 등지에 지부를 설립하는 한편, 국경 없는 의사회와 의료지원 협력 사업을 결성하고, 탈북 장학회는 물론 통일가족 결연, 탈북어린이 고아원 및 탈북자 쉼터 운영 등을 통해 탈북자를 돕고 있다. 천 목사는 200910월 두리하나국제학교를 추가로 설립했다. 중국에서 너무 오랫동안 머물러 대학에 들어가야 할 나이에 중학교에 들어가는 청소년들을 구제하기 위한 대안학교다. 이 학교는 일반 대안학교와는 달리, 국내에서 유일하게 통일을 대비하고 글로벌시대에 맞추어 국제적인 감각을 길러주기 위한 국제학교라는 점에서 차별화가 된다. ACSI라는 미국의 국제대학과 연결해 국제학교를 졸업하면 전 세계 대학에서 학력을 인정받은 뒤 곧바로 대학원으로 진학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오후 수업은 모두 영어로 진행된다. ACSI 대학 본부가 있는 콜로라도 주에서 영광스럽게도 2009718일을 두리하나의 날로 지정하기도 했다. 뉴질랜드에 있는 AED오클랜드 학교와 자매결연하여 그곳에서 두리하나국제학교 학생들의 랭귀지 과정은 전원 장학생으로 받아 주겠다고 약속했다. 두리하나국제학교는 세계적인 감각을 지닌 인재로 길러내는 곳으로 성장할 것이다. 2010년엔 서울시내 모처에 학교를 세울 계획이다.

또 하나 현재 한국에 들어와 있는 탈북자가 18.000여명이 되는데 이들의 삶에 자립기반이 될 4.000여 평의 통일동산을 만들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는 학교부터 회사 등 자급자족하며 한국 사회에 뿌리를 내릴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두리하나국제학교나 통일동산의 궁극적인 목적은 통일 이후를 대비하는 것이다. 이들이 남과 북의 완충역할을 해주기 바라는 의미에서다. ‘18.000여 명을 못 품으면 통일 이후 2.000만을 품을 수 없습니다.’ 탈북자를 통해 남북통일을 대비하는 천 목사의 소신이다.


탈북자의 대부, ()두리하나 이사장, 두리하나교회 담임목사, 두리하나국제학교 교장.

千 璂 元 56. 7. 6 [慶北 山]

학력
백석대학대학원 졸

이력
()두리하나 이사장
두리하나국제학교 설립자
두리하나교회 담임목사
탈북자를 중국 국경을 넘어 몽골로 탈출시키다 옥살이 8개월
2003617일 문화일보 평화의 인물 선정
20071013Wall Street Journal에서 노벨평화상 유력 후보로 보도

언론소개
주간지 및 월간지 : ‘National Geographic’(’09.2), ‘ReadersDigest’(09.8),월간조선’(’02.10, ’08.8, ’13.7)신동아’(’02.10),월간중앙’(’02.10, ’06.6), ‘레이디경향’(’06.6), ‘주간동아’(’04.436), ‘일요시사’(’02.347), ‘시사저널’(’06.866), ‘뉴스메이커’(’04.590), ‘시사메거진’(’04.1), ‘Newsweek’(’04.644), ‘‘일요신문(’06.5), 신앙셰계’(’02.10), ‘선교타임즈’(’05.3, ’04.10), ‘플러스인생’(’09.1), 외 다수.
일간지 : ‘Wall Street Journal’(’06.5.12, 07.10.13,), ‘NewYorkTimes’(’03.1.22), ‘LA Times’(’02.10.27, 03.1.4, 06.5.21, 06.10.16), ‘Washington Post’(’03.5.3, 07.11.18), ‘The Independent’(’02.11.19), ‘讀賣新聞’(03.2.21, 03.2.27, 06.5.10), 每日新聞’,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 ‘한국일보’, ‘국민일보’ ‘문화일보’ ‘경향신문’ ‘서울신문’ ‘한겨레’.
TV 매체 : CNN(’07.4.16, 09.11.18) ‘World News’, ABC(’09.3.21), ‘Recently on World News’, PBS(’09.6.30,), ‘A Missionary's Perspective’, BBC(’08.5.29, 08.5.31, 08.6.1) ,‘On the border’, TBS(’03.2.12) ,‘脫北眞相’, NTV(’02.11.21, 02.12.3, 02.12.4) ,‘北朝鮮發 自由行 決死脫出劇’, FUJITV(’02.8.25), ‘脫北 者衝擊現實’, TVASAHI(’04.7.27, 04.12.29, 06.12.30), ‘북조선 붕괴 시나리오의 진상, KBS(’03.8.1), ‘北韓 리포트’, KBS(’04.8.22), ‘남북의 창’, KBS(’03.8.1),‘꿈을 심는 사람들’, KBS(’08.6.23), ‘김동건의 한국 한국인 탈북자의 대부 천기원 편’, MBC(’01.6.19), ‘PD수첩’, MBC(’03.1.23, 03.1.30, 04.10.27,), ‘아주 특별한 아침’, MBC(’05.2.6), ‘일요토픽’, 매일경제TV(MBN), ‘탈북에서 망명까지 천기원 목사 - 피플 in 피플(’06.6.7), CBS(’02.10.12), ‘새롭게 하소서 - 두리 하나 선교회 천기원선교사’, CTS(’02.9.12), ‘오늘도 임마누엘 - 감옥 속에서 그들의 고통을 느꼈습니다뉴욕 기독교 TV(’04.9.13), ‘탈북자 선교 - 이렇게 생각하며’ KBS(’뉴스9) 80여회, MBC(’뉴스데스크) 50여회, SBS(’8시뉴스) 30여회 등, 전 세계 120여 언론사에 수십 차례 보도 및 기사화.
영화 : Incite Productions ‘Seoul Train’.

201년 4월 한국인물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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