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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스
    등록일 : 2009-06-15 오전 11:04:52  조회수 : 893
  35 . “잡히면 끝장” 30만 숨죽인 나날, 탈북여성의 인권유린
  등록자 : 경향신문        파일 :
출처: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02060808361&code=910303
 “잡히면 끝장” 30만 숨죽인 나날, 탈북여성의 인권유린

국군포로 가족 9명의 강제 북송사건 후 랴오닝, 지린, 헤이룽장성 등 중국 동북 3성 거주 탈북자들은 고통스러운 겨울을 나고 있었다. 감시의 눈길은 갈수록 엄혹해지고 탈북자들과 지원단체들은 모두 '납작 엎드려' 있었다. 탈북자들의 최대 근거지인 랴오닝성 선양(瀋陽)에 거주하는 탈북자들의 삶은 특히 고단했다.
 

지난달 28일 선양주재 한국 총영사관 담장 옆 골목에서 중국 공안들이 긴급하게 어딘가로 뛰어가고 있다. 한국 총영사관 주변에는 북한과 미국의 총영사관이 자리하고 있어 유독 경비가 삼엄해 늘 긴장된 분위기가 연출된다. 선양/정지윤기자

동북 3성은 200만명에 달하는 중국 동포와 한국인 관광객 및 한국 업체, 한국인 사업가 등이 몰려 탈북자들의 은신처로 가장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다. 북한과 가깝고 탈북자 지원단체와 은밀히 한국행을 주선하고 있는 점조직도 많다. 동북 3성에 거주하는 탈북자는 10만~30만명으로 추정된다.

지난달 말 경향신문 취재팀은 선양 인근 한 농촌 지역에서 탈북자 서철수씨(28·가명)를 만났다. 어려운 만남이었다. '접선 장소'를 5번이나 바꾼 뒤에 만남은 성사됐다. 그와 얘기를 나누는 동안 동료 탈북자들이 하나 둘 모이더니 6명이 됐다. 안전을 거듭 확인한 뒤에야 외부인들을 접할 수밖에 없을 만큼 그들은 위험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서씨는 탈북 후 3번 붙잡혀 북송됐다가 4번째로 중국에 왔다. 그는 "지금 기자 선생님 만나러 나온 것도 목숨을 건 일"이라며 "이번에 잡히면 끝장"이라는 말을 반복했다. 3번째 북송된 2005년 그는 함경북도 함흥의 악명높은 '55노동단련대'로 끌려가던 도중 탈출했다. 함께 북송되던 도중 아버지는 구타당해 숨졌다. 아버지의 시신이 길바닥에 함부로 버려진 직후 탈출을 감행했다. 또 잡히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에 항상 극약을 몸에 지니고 다닌다.

이들은 탈북자 신분을 감춘 채 식당이나 공장에서 일하고 농사일도 하며 목숨을 연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주변에서는 이들이 탈북자임을 다 안다고 했다. 신고당하면 꼼짝없이 북송된다. 뼈 빠지게 일하고 임금을 못받아도, 누가 시비를 걸어도 '말썽날까봐' 꾹 참아야 한다. 한 탈북자는 "한인도, 조선족도, 동료 탈북자도 다 고발꾼 같다. 믿을 것은 나밖에 없다"고 말했다.

서씨는 선양 주재 한국총영사관에 도움을 청한 적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적극 도와줄 수 없어 미안하다"는 대답만 들었다. 납북자나 국군포로가 아닌 일반 탈북자들은 한국 정부의 도움을 받기가 어렵다.

탈북자들은 국군포로 가족 북송 이후 "모든 것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고 했다. 북한은 국경 경비를 강화했고, 중국 공안의 감시망은 더욱 촘촘해졌다. 탈북자들은 행동 반경을 극도로 좁히고 있다. 거처를 옮기고 연락처를 숨기는 등 갖은 애를 다 쓴다. 탈북자 지원단체들과, 돈을 받고 한국행을 주선해주는 브로커들은 일제히 활동을 중지했다.

한때 탈북자들로 넘쳐나던 선양의 한국인 밀집지역 시타(西塔)에서도 그들의 자취는 찾기 어려웠다. 식당·유흥업소 등에서 일하던 이들이 대부분 사라졌다. 한 업소 주인은 "탈북자들이 중국 내륙으로 깊숙이 숨어 들어갔다"면서 "씨가 말랐다"고 했다.

선양의 한 룸살롱에서 일하는 탈북자 최모씨(여·21). 그녀는 중국에서 번 돈을 북한의 가족에게 송금하는 전형적인 '생계형 탈북자'다. 20%의 수수료를 떼는 '중간 전달자'를 통해 매달 1000위안(약 13만원)을 함북 청진에 보낸다. 한국행을 원하지 않는 그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는 "탈북자 관련 뉴스가 나올 때마다 가슴이 조마조마하다"며 "칭다오(靑島)나 톈진(天津) 쪽으로 피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극도로 몸을 사리는 것은 '탈북도우미'들도 마찬가지였다. 지린성 옌지(延吉)에서 탈북자들의 한국행을 주선해온 중국 동포 장모씨는 "지금은 너무 긴장돼 있는 상태"라며 "탈출행을 돕던 '전문가'들이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중국 동포와 한국인들의 외면도 탈북자들의 입지를 더욱 좁게 만들고 있었다. 탈북자를 고용하거나 숨겨주다 적발돼 벌금을 물고 추방당하는 사례가 늘면서 탈북자를 멀리하고 있다. 삶이 각박해지면서 탈북자들의 강·절도가 잦아졌고, 그 때문에 중국 동포 등이 도움을 거두는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다. 북한으로 갈 수도 없고 숨을 곳도 없는 탈북자들은 마치 투우장에 끌려나온 황소처럼 이국에서 울부짖고만 있었다.

2007년 02월 05일 08:08:19〈선양·단둥·옌지|유신모·김유진기자〉

탈북여성의 인권유린

'중국에서는 여자가 남자보다 훨씬 경쟁력이 있다.' 탈북자들 사이에 떠도는 자조섞인 말이다. 탈북 남성은 노동력 착취만 가능하지만 탈북 여성은 거기에 더해 '성적 착취'도 할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이러니 중국 거주 탈북자들의 고초는 남성보다 여성이 훨씬 심할 수밖에 없다.
 

중국 동북지방의 한 술집에서 접대부로 일하고 있는 탈북 여성들이 한국 노래를 부르고 있다. 탈북 여성들은 팁으로 통상 100~200위안씩 받는다. 중국 동북지방/정지윤기자

탈북 여성들이 중국에서 가장 쉽게 정착할 수 있는 방법은 중국 농촌 남성과 결혼하는 것이다. 지린(吉林)성·랴오닝(遼寧)성 등 국경지역 농촌은 결혼적령기 남녀 성비가 30대 1에 이를 정도로 심각하다. 신붓감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이다. 매매혼도 흔하게 이뤄진다. 더 큰 문제는 이 결혼이 합법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중국 당국이 설사 탈북 여성이 중국인과 결혼했더라도 자국민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일반적 의미의 결혼이든 매매혼이든 이 점에서는 똑같다. 남자 쪽 재산이 있을 경우 돈을 주고 신분증을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주변에서 탈북자라는 것을 다 알기 때문에 완전한 보호책은 될 수 없다. 일부 중국인 남편은 이를 약점 삼아 몇년간 부부생활을 한 뒤 돈을 받고 다른 사람에게 탈북 여성을 넘기기도 한다. 그렇지 않는다고 해도 탈북 여성은 남편과 동등한 권리를 가진 부부로 사는 것은 포기해야 한다.

지린성의 한 농촌 지역에 50대 홀아비에게 팔려갔다가 온갖 학대 끝에 북으로 되돌아간 한 여성의 이야기는 탈북 여성의 중국생활을 웅변한다. 지난 2005년 두만강을 넘어 탈북한 30대 여성은 인신매매를 당했다. 한족 농가에 팔린 그는 농부의 성적 노리개가 됐다. 남자는 농사일을 하러 나가면서 그를 빈 뒤주에 감금했다. 매일 들려오는 여자 울음소리에 참다 못한 이웃이 공안에 신고했다. 농부는 구속되고 여자는 만신창이가 된 채 3개월 만에 북한으로 돌려보내졌다. 한 농가에서 아버지와 아들 4형제에게 성적 학대를 받다 탈출한 여성 이야기도 있다.

현지 소식통에 따르면 탈북 여성의 '몸값'은 천차만별이다. 나이와 외모에 따라 수백~수만위안을 오간다. 미국 북한인권위원회는 지난해 탈북자 1346명을 대상으로 조사해 만든 연구보고서에서 '탈북 여성들이 평균 1900위안의 몸값에 거래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탈북 여성들을 노리는 인신매매단도 활개를 치고 있다. 인신매매단과 결탁한 브로커에게 속아 북·중 국경을 넘자마자 바로 팔려가는 경우도 허다하다. 중국 농촌의 요청으로 북한에 들어가 여성을 빼내오는 '주문형 인신매매'도 성행한다. 베이징(北京)을 무대로 활동하는 한 인신매매단 두목은 "돈만 있으면 한시간 안에 탈북여성 100명을 소개해주겠다"고 했다고 국내 탈북자지원단체 관계자가 전한 적도 있다.

이런 과정을 경험한 탈북여성들의 다음 정착지는 대개 유흥가다. 몸과 마음이 다 망가진 채 북한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자포자기한 상태로 유흥업소로 흘러가는 것이다. 한 탈북자 출신 접대부는 "지금이라도 갈 수만 있다면 북조선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몸 버리고 공안에 쫓기고, 희망이 없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고 했다.

탈북자지원단체인 '두리하나선교회' 천기원 목사는 "탈북 여성에 대한 인신매매는 불법 거주자라는 신분상의 약점을 노린 폭력범죄"라며 "중국 당국이 이들을 강제 북송만 하지 않는다면 탈북 여성의 인권은 크게 개선될 수 있다"고 말했다.

2007년 02월 06일 08:08:36〈유신모기자〉

오갈데 없는 탈북여성 아이들

"와아! 우리 엄마다! 엄마 여기 있네." 지난달 28일 중국 동북지방 한 도시에 있는 가정집. TV를 보던 민철군(7·가명)이 방 한쪽에 놓인 사진첩을 향해 달려간다. 공원에서 자신과 엄마, 아빠가 함께 찍은 사진을 담은 사진첩이다. 유리 속 너머 엄마 얼굴 사진을 어루만진다. 얼굴에는 그리움이 가득 담겨 있다. 볼에 눈물이 흘러내린다. 사진첩은 늘 방에 놓여 있지만 민철이는 처음 보는 것인 양 자주 이런 행동을 한다.
 

중국 동북지방에 있는 두리하나 선교회 탈북여성 자녀 보호소에서 한 어린이가 엄마 아빠와 찍은 사진첩을 살펴보고 있다. /정지윤기자

준원군(8·가명)도 자기 사진첩을 손에 든다. 엄마가 갓난아기 때부터 찍어 정리한 사진들이 보인다. 한 장씩 넘겨보던 준원이가 잠시 손을 멈췄다. 엄마가 자기를 안고 있는 사진이다. 뚫어져라 엄마 얼굴을 쳐다본다.

민철이와 준원이는 지난해 5월 한 식구가 됐다. 한국의 탈북자 지원단체 '두리하나 선교회'가 탈북 여성과 중국 남성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을 위해 마련한 보호소에 입소하면서다. 엄마가 북송되거나 먼저 한국행을 택해 오갈 데 없는 아이들을 먹이고 재워준다. 지난해 문을 연 보호소에는 지금까지 4명의 아이들이 수용됐다. 이중 2명은 한국으로 갔고, 민철이와 준원이는 남았다.

둘 다 탈북한 엄마가 중국에서 중국동포 남성과 결혼해 낳은 경우다. 둘을 돌보는 중국동포 ㄱ씨(31·여)는 "중국에 온 탈북 여성들은 대부분 아이를 낳는다고 보면 된다. 민철이와 준원이 같은 아이들이 중국 전체에 정말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부모에게 버림받는 아이들도 있다고 했다.

중국은 탈북 여성이 낳은 자녀들을 자국 국민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합법적 결혼으로 출생하지 않았다며 우리의 주민등록증 격인 호구를 발급하지 않는다. 중국인도 북한인도 아닌 무국적 아이들이 양산되고 있는 것이다. 호구가 없으니 학교에 갈 나이가 돼도, 급한 병원치료가 필요해도 속수무책이다. 보호소를 운영하는 탈북자 지원단체 관계자는 "이런 무국적 아이들이 중국 전역에 5,000~1만명은 족히 될 것"이라고 추산했다.

지난달 28일 탈북여성이 중국에서 출산한 아이들의 보호소로 두리하나 선교회가 운영중인 중국 동북지방의 한 아파트에서 어린이들이 뛰어나가고 있다. /정지윤기자

이러다보니 돈으로 호구를 사는 행위가 잦다. 민철이와 준원이도 아빠가 업자에게 돈을 주고 호구를 만든 뒤에야 겨우 인근 한족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됐다. 준원이는 1학년, 민철이는 학전(學前·우리의 유치원)반이다. 둘은 아침마다 손을 잡고 나란히 등교한다. 학교를 마치면 보호소에서 한글 읽기와 쓰기를 배운다. 곧잘 한다. 하지만 중국어가 훨씬 편하다.

피자와 햄버거에 사족을 못 쓴다. 또래 남한 아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나 천진난만한 이들의 웃음 뒤에는 깊은 상처가 어려 있다.

민철이는 엄마를 사진 속에서나 만날 수 있다. 4살 때 갑자기 중국 공안이 집에 들이닥쳐 엄마를 붙잡아갔다. 아빠가 잠시 집을 비운 사이였다. 민철이는 그 광경을 직접 목격했다. ㄱ씨는 "민철이가 이따금 '공안이 호구를 보여달라고 엄마에게 소리쳤고, 엄마는 팔과 몸이 줄에 묶인 채 잡혀갔다'고 말하는 것을 봐서 아직도 그때를 아프게 기억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이따금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토로하는 민철이가 ㄱ씨는 안쓰럽기만 하다. 민철이의 엄마는 북송됐다. 기약없는 이별이다.

이별은 민철이에게 낯설지 않다. 민철이 아빠는 돈을 벌기 위해 지난해 한국에 갔다. 친척집에 맡겨진 민철이는 학대당했다고 한다. 뒤늦게 이를 안 아빠가 민철이를 보호소에 맡겼다. ㄱ씨는 "처음 왔을 때는 상처입고 주눅들어 있는 상태였다"고 전했다. 아빠는 남한, 엄마는 북한, 그리고 민철이는 중국에 산다. 남북 분단 비극의 살아 있는 산물이다. 민철이 가족이 언제 만나 가정을 꾸릴지는 기약이 없다. 가정을 다시 꾸리기는커녕 민철이 엄마의 생사마저 불명인 상태다.

준원이는 그래도 사정이 좀 낫다. 희망이 있어서다. 준원이 엄마는 보름 전쯤 '두리하나 선교회'의 도움으로 중국 남부지방으로 떠났다. 한국에 가기 위해서다. 아직 연락이 없다. 준원이도 준원이 아빠 ㅂ씨(43·중국동포)도 애가 탄다. 엄마의 한국행 시도는 이번이 두번째. 지난해에는 내몽골에서 국경을 넘다가 붙잡혀 북송됐다. 2주간 구류를 살면서 척추질환과 출혈증을 앓는 등 건강이 악화됐다. 다행히 재탈북에 성공했다. 돈을 벌게 해 준다는 브로커 말에 속아 넘어간 것이라고 둘러댄 것을 북한 당국자가 믿고 석방한 것이다.

중국에 돌아온 엄마는 한국행을 결심했다. 한국에서 정착하게 되면 남편 ㅂ씨와 준원이를 데려갈 수 있다고 계산한 끝의 결정이었다. ㅂ씨도 찬성했다. 중국도 북한도 영원한 안식처가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ㅂ씨가 동북지방을 떠돌게 된 것도 준원이 엄마의 불법체류자 신분 때문이었다. 원래 농사를 지었지만 언제 어떻게 될지 몰라 막노동을 하며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일감이 많지 않아 준원이를 보호소에 맡길 수밖에 없다. 엄마가 한국행에 성공하기를 기도하는 것 외에 이들 부자에게는 다른 방법이 없다.

준원이와 민철이는 둘 다 '밤송이 머리'에 순한 눈망울을 하고 있다. 얼핏 보면 형제같다. 사이 좋게 지내는 것도 그렇다. 민철이가 짓궂게 까불어도 한 살 위인 준원이는 불평하지 않고 받아준다. 장난꾸러기 동생과 의젓한 형이다. 그렇게 서로 의지하며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고 있다.

2007년 02월 06일 08:06:24〈선양|김유진기자〉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 아이들 5천~1만명

탈북 여성들이 중국에서 낳은 자녀들은 국적을 얻지 못한다. 중국이 탈북자를 '난민'이 아닌 '불법 월경자'로 간주하고 있어 주민등록증 격인 호구를 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탈북 여성이 중국 국적 남성과 결혼해도 공민증이 지급되지 않는다.

탈북자 2세들의 실태는 파악된 게 거의 없다. 이들은 어머니의 고향인 북한과 아버지의 나라인 중국 양쪽에서 모두 거부당한 채 살아간다. 당연히 최소한의 인권마저 보호받지 못한다.

탈북자 지원단체 등에 따르면 이처럼 호적상 존재를 찾을 수 없는 아이들은 중국 전역에 5000~1만명이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동북3성에 특히 많다.

이 지역은 '인구 남초현상'이 심각해 신부감이 없는 농촌 총각들이 탈북 여성들에게 돈을 주고 '결혼'하는 일이 잦다. 1990년대 중반부터 북한의 식량난이 심해지자 탈북자가 많이 발생한 사실로 미뤄보면 이 때 탈북한 여성들이 낳은 자녀는 7~8세가 돼 학교에 갈 나이가 됐다.

하지만 호구가 없으니 달리 방도가 없다. 이러다보니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돈으로 호구를 사는 일이 늘고 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못한 집안의 아이들 가운데 호구를 사지 못한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기본적인 교육권에서 방치되는 것은 물론 아예 부모로부터 버림받는 경우도 비일비재한 것으로 전해진다.

탈북 여성이 아이를 낳은 뒤 인신매매단에 팔거나, 불안한 신분 탓에 중국 공안의 단속을 피해 숨어 다니는 동안 마땅한 보호를 받지 못하고 홀로 남겨지는 아이들도 늘고 있다.

민철이처럼 엄마가 중국 공안에 발각돼 북송될 경우, 아이만 중국에 남아 엄마와 영영 이별하고 마는 일도 있고, 준원이처럼 엄마가 먼저 한국행을 택했을 경우 수년간 기다리는 상황도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지난달 29일에는 네 살배기 아이 두 명이 이미 한국에 온 어머니의 주선으로 중국과 제3국을 거쳐 한국 입국에 성공했다. 처음 있는 일이다. 탈북자 지원단체 '두리하나 선교회'의 적극적인 보호와 정부 당국의 협조가 있었기에 이뤄진 특수한 사례이지만, 이같은 신종 '엄마 찾아 삼만리'는 앞으로 급증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한국에 왔다고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현행 국내법에 의해 북한에서 출생한 아이에게는 자동적으로 한국 국적을 주지만, 중국에서 태어난 경우에는 현지 병원에서 출생증명서를 떼와야 호적에 올리는 것이 가능하다.

탈북 여성이 중국으로 가 관련 서류를 준비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법적 자녀로 올리기 위해 중국이 아닌 북한에서 자녀를 출생했다고 거짓말하는 경우가 생긴다. 정확한 실태 파악과 이런 아이들에게 중국 내 거주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되는 배경이다.

피랍·탈북 인권연대 도희윤 대표는 "난민 인정 여부를 떠나 기본권 존중의 차원에서 중국 당국이 중국 국적의 남성과 결혼한 탈북 여성의 경우에는 범법행위를 하지 않는 한 강제북송하지 않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2007년 02월 06일 08:07:00〈김유진기자〉

인민군 女전사에서 접대부로

"고향이 그립지만 조선에서 탈출할 때를 생각하면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지난달 말 중국 동북지방에서 만난 탈북여성 ㅇ씨(30·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ㅇ씨는 고향생각이 날 때마다 두만강을 건너 북·중 국경도시 투먼으로 탈북한 2005년 여름을 자주 떠올린다. 별도 없는 캄캄한 밤에 허벅지까지 차 오른 강물을 건너는 동안 국경수비대에 들킬까봐 조마조마하던 기억은 지금도 악몽 그대로다. 폭이 좁은 쪽을 골라 걷고 헤엄치던 몇 시간이 한없이 길었다.
 

중국생활 3년째. ㅇ씨는 술집 접대부로 일하고 있다. 이곳에는 ㅇ씨 외에 탈북여성 6명이 함께 일한다. 중국 공안당국 간부와 친한 사장과 마담의 '특별 배려'로 몇달째 별 탈없이 지낸다.

ㅇ씨는 술을 따르고 마시고,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한국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안줏감으로 해바라기 씨앗을 까는 손놀림이 능숙했다. 주 수입원은 팁. 통상 100~200위안씩 받는다. 많을 때는 하루 서너명까지 접대하기도 한다.

그는 "처음 탈북할 때는 이런 일을 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고 말했다. 짧은 치마, 몸에 달라붙는 상의에 화장을 한 ㅇ씨. 그는 6년간 인민군 휘장이 달린 단정한 제복을 입은 인민군 '여전사'였다. 신의주 인근의 부대에서 통신병으로 일했다.

만기제대 후 아버지의 권유로 탈북을 결심했다. 아버지는 그에게 "한 번 사는 인생인데 너라도 빛을 보고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며 브로커를 주선했다. 군대에서는 최소한 굶는 것을 걱정하지는 않았다. 조나 강냉이를 섞은 밥을 먹었다. 그러나 제대하니 날마다 끼니를 굶지 않으려는 '전쟁'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제대로 먹고 살고 싶다는 것 말고 또 무슨 이유가 있겠나. 힘들지만 중국 온 이후 굶지 않고 밥 먹고 살고 있으니 후회하지는 않는다"고 그는 말했다. 떠나기 전날 밤, 아버지와 동생 앞에서 눈물만 흘렸다는 ㅇ씨. 지난해 아버지는 세상을 떴다. 아버지 임종을 못했다는 자책감에 한동안 중국에 온 것을 후회하기도 했다.

ㅇ씨가 중국에서 한 일은 중국동포가 운영하는 식당 종업원. 일찍 일어나 밤 늦게까지 쉴 틈없이 일했지만 손에 돈을 쥐지 못하는 날이 더 많았다. 따지지도 못했다. 중국 당국이 탈북자를 난민이 아닌 '불법 월경자'로 간주하는 탓에 적발되면 북송되는 불안한 신분이 족쇄였다. 중국어가 어눌해 다른 일자리를 찾기도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좋은 일자리를 소개해주겠다"는 브로커를 만났다.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따라간 곳은 지린(吉林)성의 구석진 농촌. 자신보다 열살쯤 많은 한족 남성에게 팔려간 것이었다. '결혼'을 했다. 결혼생활은 당연히 행복하지 않았다. 시골생활도 힘들었고 무엇보다 희망이 없었다. 이건 아니다 싶었다.

한 달도 안돼 '도망'을 쳤다. 남편은 그를 뒤쫓지 않았다. 넓디넓은 중국 땅이니 쉽게 포기할 만했다. 짧았던 '결혼생활'에 대해서는 입에 올리지 않으려 했다.

접대부 일을 시작하면서 ㅇ씨는 북의 가족에게 매달 1000~1500위안을 부칠 수 있게 됐다. 식당 일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는 "일단 발을 들여놓은 뒤 돈을 만지게 되니 다른 일은 절대 못할 것 같다"고 털어놨다.

그는 "어떻게든 땀 흘려서 돈을 벌려고 했지만 앞길이 막막했다. 누군가가 '여기서 먹고 살려면 너무 깨끗하게 살 순 없다. 나쁜 일도 아니고 필요한 일이다'라고도 충고했다"고 했다. "이미 버려질대로 버려진 몸이니 더 버릴 것도 없고, 이 돈으로 동생을 도와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동생에게는 이 사실을 숨기고 있다.

ㅇ씨는 "꼭 한국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한국에 가게 되면 아무리 궂은일을 하더라도 두려움 없이 떳떳하게 일하겠다"고 덧붙였다. 탈북 후 함께 지낸 친구가 최근 내몽골을 거쳐 한국에 갔다며 "가까운 친구가 갔다고 하니 신기하면서도 언젠가 나도 갈 수 있을 것만 같다"고도 했다. "한국에 가면 고향 사람들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라고 하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사실 중국에서는 탈북자들끼리 더 견제하고 조심하는 것이 있는데 정말 좋겠다"고 했다.

옆에 있던 또다른 탈북 접대부여성 ㄱ씨(26)가 입을 열었다. "한국에 가면 가장 좋지만, 만약 그것이 힘들다면 중국이라도 좋으니 안전하게만 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북에 있는 가족들하고 계속 연락할 수 있잖아요."
2007년 02월 06일 08:08:00〈김유진기자〉

'탈북 도우미' 누가 어떻게?

북한에서 중국, 중국에서 제3국까지 적어도 두차례 이상 국경을 넘어야 하는 험난한 여정 탓에 탈북자의 한국행이 단독으로 성사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길을 안내하고 위험을 피하게 해주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탈북도우미'와 '브로커'들이다. 올 초 탈북한 납북어부 최욱일씨의 탈북 과정에는 모두 8명의 탈북도우미가 개입된 것으로 알려졌다.

초창기 탈북도우미들은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주를 이뤘다. 북한의 인권 상황에 분노하거나 탈북자들의 절망적인 현실에 동정심을 느낀 종교 단체와 국제 인권 단체 소속 회원들도 있었다. 돈을 받지 않고 봉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 국적의 납북자나 국군포로의 귀환을 추진하는 움직임도 있었다.

납북자가족모임 최성용 대표는 "정부의 철저한 외면 속에서 납북자 한 명을 구하면 50여명의 소식을 알 수 있다는 심정으로 이들의 탈북을 주선했다"고 설명했다. 한국행을 노리고 탈북해 한국으로 오는 '기획 탈북'을 했다는 얘기다.

기획 탈북에 대해선 비판적 견해도 있다. 북한을 자극해 남북관계를 악화시키거나 중국 당국을 자극해 중국 내 다른 탈북자들의 입지를 좁게 만든다는 것이다. 탈북자 인권 문제를 북한 정권을 압박하는 카드로 사용하는 등 정치적 행동이라는 지적도 제기됐다.

하지만 탈북지원단체의 생각은 다르다. 지원단체 관계자는 "기획 탈북이라는 용어나 비판은 억울하다. 사람 목숨이 걸린 일인데 계획 없이 추진할 수 있느냐"고 반박했다.

그는 또 "중국 내 탈북자들은 이미 탈북한 상태로 자유를 찾아 한국에 가려는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북한 사회와 경제 체제의 모순에서 탈북자가 양산되는 것이지 자신들이 일부러 북한에서 빼내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탈북도우미들의 활동은 갈수록 조직화, 체계화하고 있다. 한국행 루트도 한층 다양해졌다. 한국행을 희망하는 탈북자가 급증하면서 나타난 흐름이다. 요즘 들어 각광받고 있는 중국 쿤밍(昆明)을 통해 태국으로 진입하는 루트의 경우 6~10명의 탈북자들이 그룹을 이뤄 움직인다. 그렇다고 위험이 없는 것은 아니다. 중국 공안 등 감시의 눈길을 피해야 하고 국경을 넘는 과정에서도 온갖 곤란을 겪는다.

최근에는 탈북자 출신 브로커들도 활개를 치고 있다. 중국 동북 3성 일대를 중심으로 점조직을 이뤄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생생한 탈북 경험을 자산으로 자신이 밟았던 루트와 중개인들을 소개하고 그 대가로 보통 정착금 중 일부인 400만~500만원 상당을 요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밖에 남한과 서방세계 소식을 알고 싶어하는 북한 사람들이 상당수 청취하는 미국 자유아시아방송도 한국행을 희망하는 탈북자들 사이에서 정보를 얻는 창구 역할을 하고 있다.

2007년 02월 06일 18:07:59〈김유진기자〉

"北 올 보릿고개 혹독" 뒤숭숭한 소문

압록강을 경계로 신의주와 이웃한 중국의 접경도시 단둥(丹東)은 북한의 정세와 변화를 가장 먼저 느낄 수 있는 온도계와 같은 곳이다. 중국과 북한의 전체 교역량 80%가 단둥을 통해 이뤄지기 때문에 양국 관계가 악화되면 단둥의 분위기가 가장 먼저 얼어붙는다. 단둥 시장의 물가로 북한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중국 단둥과 북한 신의주를 잇는 다리인 ‘조중(朝中·북한과 중국) 우의교’. 중국 당 간부들이 북한쪽으로 가는 트럭을 지켜보고 있다.

-대북제재로 교역 물량 줄어-

인구 70만명의 단둥은 변경이라는 지역적 특성에 힘입어 날로 번창하고 있다. 대북 무역을 하는 사업가들이 몰리고 강변에서는 북한과의 밀무역도 성행한다. 북한 쪽을 가까이서 둘러보려는 한국인 관광객도 늘어나고 종교 단체와 시민단체의 대북 원조도 활발하다.

그러나 지난해 10월 북한의 핵실험 이후 단둥의 분위기는 조금 달라졌다. 분주한 움직임은 그대로이지만 대북제재로 인해 단둥과 북한을 오가는 물량은 크게 줄었다. 압록강변의 상인들은 “최근 들어 조금씩 살아나고는 있지만 지난해 이맘때와 비교하면 크게 줄어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눈으로 변화를 실감하기는 어렵다. 북한이 국경지역 경비를 강화했다고는 하지만 한인 거리인 시내 산마루(三馬路)에는 여전히 북한인들이 많다. 압록강 너머 신의주의 모습도 변함없이 무표정하다. 재중국단둥한인회 오완 부회장은 “접경지역 특유의 긴장감이 항상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최근 북한 정세와 관련해 단둥에서 느껴지는 변화는 아직 없다”고 말했다.

북한제 물품 판매점이 집중한 단둥역 근처 화롄상점에 북한의 우표와 담배, 배지 등이 진열돼 있다.

단둥 시내 한 백화점 매장에 한국 일본제 외투와 스웨터 등 헌옷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겉으로는 평온한 일상 유지-

단둥역 근처 화롄(華聯)상점에는 북한 물건을 파는 가게가 집중적으로 모여 있다. 도자기·절구·놋그릇 등 골동품에서부터 김일성 초상화, 우표, 일제시대 땅문서 등 희귀한 기념품이 합법·불법적 경로를 통해 쏟아져 들어온다. 이곳에 물건이 많아지면 그만큼 북한 경제가 어려워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에는 가짜 북한 골동품을 중국에서 제작해 유통시키는 전문 판매조직까지 등장했다는 전언이다.

시내 푸싱지에(步行街)에 자리잡은 백화점 한쪽 매장에는 중고 의류를 파는 가게들이 있다. 일본과 한국에서 모아진 외투와 스웨터 등 헌옷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주고객은 북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마대자루를 가져와 옷을 잔뜩 담은 뒤 무게를 달아 값을 지불하고 북한으로 가져간다. 예전에는 한국 상표를 가위로 오려내고 팔았지만 요즘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압록강 중간의 섬인 위화도에서 빨래하고 있는 북한 처녀. 압록강 관광선에서 찍었다.

압록강내 위화도에서 북한 어린이들이 볏짚을 꼬아 만든 새끼줄로 줄넘기 놀이를 하고 있다.

외관상 단둥은 평온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 속에는 당겨진 활시위처럼 팽팽한 긴장감이 존재한다. 춘궁기를 앞두고 올해 북한에서 극심한 식량난이 빚어질 것이라는 뒤숭숭한 소문이 벌써부터 나돌고 있다. 특히 지난해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 이후 한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대북 지원이 크게 줄거나 끊겨 북한의 올 봄은 유난히 혹독할 것이라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다.

2007년 02월 06일 18:09:38〈단둥|유신모기자 사진/정지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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