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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스
    등록일 : 2009-05-20 오후 6:13:27  조회수 : 804
  1 . 탈북난민들을 자유의 땅으로 인도하며...  
  등록자 : LAT        파일 :

Los Angeles Times - latimes.com

October 27, 2002  SUNDAY REPORT

탈북난민들을 자유의 땅으로 인도하며. . .
<중국공안과 몽골의 험한 자연조건을 상대로 죽음을 무릅써가며 북한사람들의 탈출을 돕는 한 선교사의 이야기>

LA TIMES Valerie Reitman 기자

English

얼렌호트, 중국-- 최후의 만찬시간이 되었다. 목자는 자기가 돌보아온 양무리를 식탁주변에 불러모았다. 식탁 위에는 김이 무럭무럭나는 흰 쌀밥과 돼지고기 볶음, 깐두부요리 등이 놓였으나, 7명의 탈북자들은 너무 긴장한 나머지 음식에 본격적으로 손을 대지 못한다.

이 7명중에는 북한의 핵미사일 프로그램에 종사했던 엘리트였다고 주장하는 여자, 팔에 난 많은 흉터가 이전에 여러 번 탈출시도를 했음을 증명해 주는 근육질 퇴역군인, 인신매매 되었다 풀려 나온 여자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 여자는“마음을 강하고, 냉정하게 해야한다”는 말에 아기를 두고 떠났다.
 
그들의 가이드인 천기원 선교사는 호감 가는 성격의 한국인으로, 한 때는 잘 나가는 사업가로 일본 사업가들에게 골프클럽을 팔기도 했던 경력의 소유자이다. 온화한 성격과 크리스천으로서의 열정을 가졌음에도 천선교사는 자기가 맡은 이 북한사람들을 근본적으로 믿지는 않는다. 그는 그래도 이들을 돕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있는 것이다.

천 선교사가 입을 열어 기도를 시작한다. “하나님, 우리는 이제 여행의 마지막 끝에 와 있습니다.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주소서. 저들이 무사히 갈 수 있게 해 주소서.” 사람들이 서로 손을 잡고 여자들은 조용히 흐느끼기 시작했다.

이 “선택받은 자들”은 바로 자유의 땅인 한국으로 가는 생명철도의 한 종착역에 도착한 것이다.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은 모두 중국으로 몰래 건너온 뒤 이들을 보호해주는 기독교 선교사들을 찾아갔거나 선교사들의 연락망에 포착된 사람들이다. 선교사들은 자신들이 운영하는 안가(安家)에 이들을 감춰두고 기독교 신앙을 가르쳐 준 뒤 중국대륙을 수백 마일씩 가로질러 이들을 옮기는 일에 착수한다.

이제 약 한 시간 후면 이들은 7피트(210센티미터)나 되는 철조망 밑을 기어 몽골 쪽으로 넘어갈 것이다. 만일 성공하면 그들은 천 선교사를 서울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잘못된다면, 그들은 죽을 수도 있다. 이 모든 상황이 너무나 위험하다는 것을 잘 아는 천 선교사 자신도 속으로는 불안해 마지않는다. 험한 자연조건 때문에 낭패를 볼 수도 있고, 중국공안에 잡히는 날에는 북한으로 송환 당해 죽도록 매를 맞거나 심지어는 사형을 당할지도 모른다.

소형 비디오 카메라의 스크린을 통해, 천 선교사는 그들이 가야할 곳의 모습을 보여준다. 철조망과 나란히 나있는 흙모래길, 침입자의 접근을 막기 위해 설치해 놓은 1피트(30센티미터) 길이의 뾰족침판, 그리고 그들의 목적지인 몽골 초소가 멀리 보인다. 여기까지만 가면 성공이다. 잠깐동안은 몽골감옥에 갇히겠지만 천 선교사가 이미 몽골 사람들에게 뇌물을 뿌려놓았기 때문에 그들은 곧 한국대사관에 넘겨지게 될 것이다.

천 선교사는 가능한 한 침착한 목소리로 “빨리 움직이되 뛰지는 마”라고 지시한다. “트럭이나, 국경수비대원이나, 개가 있을지도 몰라.”

그리고 만약 붙잡히면 반드시 중국말을 유창하게 하는 두 명만 말을 하고 다른 사람들은 가만히 있어야 한다고 경고해 준다. 또 자신들은 유목지의 사막화(沙漠化)를 연구하는 외국 과학자들을 안내해주는 동네 양치기들이라며 신분을 위장하도록 일러준다. 그리고 이제 막 일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 외국인들이 보수를 너무 짜게 주었다며 툴툴거리란다.

천 선교사는 “너희들 만나고 나서부터 순 거짓말쟁이가 되었다”고 익살을 떤다. 도덕적 타협이 불가피하고, 보상도 거의 없는 사역임을 인식하고 하는 말이다. 경험을 통해 천 선교사는 탈북자들의 한국사회 적응이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역경이 남한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남한에 온 탈북자들은 대부분 직장을 가지려고 노력하지도 않고, 다른 탈북자들의 탈출을 도와주지도 않으며, 교회에 가거나 기도도 하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그들은 받은 돈을 도박이나 술에 탕진해 버린다.

천 선교사는“탈북자들은 가기 전에 내 앞에서 늘 울고 갑니다. 그들은 앞으로 자기들의 삶을 하나님께 바치고 살 것이라며 떠나지만, 그걸 늘 잊어버립니다.”

때로는 그보다 더 나쁜 사람들도 있어서 자신을 돕는 선교사를 당국에 신고하는 적도 있다. 미국 버지니아주 린치버그시에 집이 있는 김동식 목사는 현재 행방불명인데 바로 그 같은 경로로 북한공작원에게 납치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낳고 있다. “그들 중 어떤 사람이 나를 배신할지, 그건 아무도 모릅니다”라고 천 선교사는 말한다.


늘어나고 있는 탈북자들

수백만의 이산가족을 낳은 전쟁이 한반도를 반으로 갈라놓은 지도 반세기가 지났다. 엄밀히 따지면 남과 북은 아직도 전쟁 중이며, 그들 사이의 국경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무력이 대치하고 있는 곳이다. 때때로 개혁이나 화해를 향한 변덕스런 제스처를 보이는 적도 있지만 북한은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폐쇄된 닫혀있는 사회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남한으로 귀순하는 탈북자들의 수는 매년 수십 명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천 선교사 같은 사람들이 탈북자들을 수백 명씩 한국과는 반대 방향인 중국 내륙쪽으로 옮기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그들이 이 일을 하는 이유는 기독교의 구제정신과 한반도의 통일을 향한 염원이다. 천 선교사를 비롯한 활동가들의 노력 덕분에 작년에는 583명의 탈북자들이 서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는 2000년도에 비해 거의 두 배 가까운 숫자이다. 올해는 현재까지 838명 이상이 들어왔다. 이들은 모두 한 번에 몇 명씩 들어온다.

천 선교사가 이 일에 뛰어든 것은 1999년 8월 중국을 방문하여 남편이 속절없이 지켜보는 가운데 북한 여자가 중국 남자한테 팔려 가는 모습을 본 뒤였다. 또 그는 밤사이 엄마와 언니가 팔려가고 난 뒤 혼자 남아 거리에서 구걸하고 있는 어린 여자아이를 만나기도 했다.

“자신들의 가족이 눈앞에서 팔려나가는데도 대책 없이 서서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그 남자와 어린 소녀의 모습을 나는 지워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들에 대한 기억은 두고두고 나를 괴롭혔습니다”라고 회상하는 천 선교사는 그 후 150명 이상의 탈북자들을 도와 서울로 오게 하였다.

이밖에도 350명의 북한사람들이 중국과의 국경을 이루는 두만강 북쪽에 소재한 여러 안가들에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두만강 저쪽은 지난 10년간 2백만 명의 아사자를 낸 북한 땅이지만, 이쪽은 시장에 쇠고기, 사과, 바나나, 채소, 각종 양념과 한국인들의 주식인 김치가 넘쳐나도록 풍요한 중국 땅이다.

중국 쪽에는 북한 땅이 훤히 보이는, 전망 좋은 곳이 많이 있다. 때로는 강둑에 앉아있는 북한 군인이 눈에 들어 올 때도 있다. 어느 곳에서는 목가적인 분위기의 시골역사에 걸린 커다란 김일성의 초상화가 보이기도 한다. 산은 땔감으로 쓰기 위해 나무를 모두 베어내 하나같이 민둥산이다.

돈을 내야만 볼 수 있는 망원경으로 관찰한 북한의 국경도시 남양에는 으스스할 정도로 사람의 모습이 적었고, 나지막한 건물들은 대부분 비어있는 듯 했다.

탈북자들은 북한에서의 일상생활이 공포의 연속이라고 말한다. 먹을 것이라고는 풀뿌리와 나물을 넣고 끓인 멀건 죽뿐이고, 밭에서 옥수수를 훔친 죄로 총살당하는 모습을 목격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굶어죽은 가족을 낡은 쌀포대로 감아 시체가 가득한 산기슭에 묻고 온 이들도 있다.

북한을 탈출하려면, 시계나 패물, 혹은 미국 돈으로 환산해 몇 달러 정도의 돈을 몇 십 미터마다 지키고 있는 배고픈 군인들에게 뇌물로 주고 나오거나, 그들의 눈을 피해 몰래 강을 건너기도 한다. 강은 수심이 낮은 곳은 걸어서 물을 헤치고 나올 수도 있고, 어떤 곳은 헤엄쳐 나오기도 하며, 겨울에는 꽁꽁 얼은 강 위를 총총 걸어서 나온다. 중국 쪽에는 지키는 군인들이 별로 없다.

중국에 도착하면, 굶주려 영양실조가 된 어린아이들은 도문의 장마당을 훑으며 먹을 것을 구걸하고, 어른들은 농가나 공장을 찾아가서 일자리를 알아보곤 했다. 다급해진 사람들 가운데에는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피난처를 찾아 외국공관으로 뛰어든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의 존재는 점점 중국정부 당국을 불편하게 만들었고, 중국정부는 이들을 색출해 송환해 왔다. 중국은 탈북자들을 정치난민이 아닌, 더 나은 삶을 위해 유랑하는 경제난민으로 보고 있으며, 전통적인 우방 북한과 난민은 서로 송환시킨다는 조약을 맺고 있기도 하다. 때로는 북한군인들이 이 허술한 북·중 국경을 넘어와 직접 탈북자들을 잡아가기도 한다.

조선족 인구가 많은 이 지역으로 넘어온 탈북자들은 외모로는 구분되기 어려워도 중국어를 못하기 때문에 적발되기 쉽다. 따라서 기초적인 중국말조차 할 수 없는 탈북자들은 집밖으로 나오는 적이 거의 없다.

이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는 몇 안 되는 길 중 하나가 바로‘지하철도(underground railroad)'이다. 탈북자들은 이것을 기독교 선교사들이 운영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무신론을 신봉하는 사회에서 성장한 그들에게는 생소한 일일지 몰라도 이 지하철도를 이용하고자 신앙을 가지거나, 아니면 가진 척하기도 한다.

그들은 또 한국정부가 귀순자들에게 정착금으로 주는 미화 2만 8천불 상당액과 집, 직업훈련 등, 평생 받는 월급을 모두 합쳐 봤자 수백 불에 지나지 않는 그들에게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만큼의 엄청난 혜택이 기다리고 있음을 배우게 된다.


선교사들의 동기

20대 자녀 둘을 둔 이혼 남으로 올해 46살인 천 선교사는 쉽게 웃고, 또 사람들을 쉽게 웃기는 재주를 지녀 심리적으로 어려운 처지일 수밖에 없는 탈북자들의 긴장을 풀어주기에는 적격인 사람이다. 그는 벨 보이부터 시작해서 매니저까지 승진했던 17년 경력의 호텔맨이었다. 호텔에서 성공한 그는 동경의 골프용품점과 서울의 일식집 등 여러 사업에 손을 댔다가 성공과 실패를 골고루 맛보았다. 사업의 실패를 2억여원의 빚더미에 올라앉게 된 그는 집과 가구를 팔고 아이들까지 친척과 아이들 친구 집에 맡기기에 이른다.

몇 개월 동안 그는 라면으로 끼니를 때웠고, 주머니에는 지하철 요금도 없었다. 자살할 생각으로 약병을 가까이 두기도 했다. 차차 그는 이 역경들이 사업가가 되지 말라는 하나님의 뜻임을 깨달아, 지금은 장로교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을 전공하고 있다.

그는 북한난민들을 돕고 남북으로 분단된 한반도를 통일하는 일을 시작하면서 '두리하나'라는 선교회를 설립하였다. 이 뜻은 '둘이 하나가 된다'는 의미로, 600명 가량 되는 회원들의 재정지원으로 운영되고 있다. 그는 그가 가장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왔다고 말한다. 한번은 그가 경제적으로 매우 힘들 때, 두레교회라는 서울의 큰 교회가 탈북자 사역에 쓰라고 1만 불을 도와주기도 했다.

두리하나의 헌금은 중국내의 안가(安家) 임대료, 식비, 그리고 국경지대까지 가는 기차요금, 한글로 된 성경책 등에 쓰인다. 그는 탈북자들을 대체적으로 몽골로 인도하지만, 베트남 정글을 관통하는 루트와 비 공산권 우호국인 태국, 캄보디아 같은 나라를 통하는 루트도 확보하고 있다.

식당건물 4층 꼭대기에 위치한 두리하나 사무실 겸 천 선교사의 숙소 벽면은 이러한 지하철도 탈출루트가 표시된 지도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는 탈북자들을 데리러 중국으로 떠나기 전에 조용히 한국정부와의 초석을 깔아놓는다. 탈북자들을 위한 지하철도는 매우 민감한 사안이기 때문에, 한국정부의 고위관리들은 공식적인 언급을 거의 피하고 있다. 이들이 천 선교사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도 확실치 않다. 하지만 천 선교사는 정부측 요원 5명이 일상적으로 서울에서 그의 뒤를 밟고 있다고 말한다.

천 선교사는 이번 경우 정부 관계자들이 분명 북한의 미사일 공장에서 일을 했다던 여성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할 것이라고 파악했다. 북한에서 고위직에 있었던 사람일수록 한국 정부는 더 흥분하기 마련이니까. . .

탈북자들이 서울에 도착하면 그들의 신원을 가려내기 위한 신문이 시작된다. 북에서 나온 사람들은 자신의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여권이나 신분증 등 아무런 증명서가 없기 때문에, 한국정부는 이 과정을 통해 그들이 북한에서 파견한 간첩이나 정착금을 노리고 탈북자를 가장해 입국한 중국 조선족인가 아닌가를 가려내야 한다. 이 과정을 거친 탈북자들은 쇼핑하는 법, 지하철 타는 법, 인터넷 사용법, 자동차 운전 등을 가르쳐 주는 기숙사 딸린 교육시설로 옮겨진다.

토요일 아침 천 선교사는 '두리'와 '하나'라는 이름을 가진 강아지 두 마리(슈나우저와 푸들)를 뒤로 한 채 아침 일찍 집을 나선다.


중국행 비행기

서울에서 중국 동북부에 위치한 장춘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천 선교사는 위성을 통해 위치를 알려주는 장치인 작은 장비 하나를 만지작거린다. 중국 내륙에서는 매우 유용하게 쓰일 것이란다.

그는 음침한 장춘 비행장에서 '나같은 죄인 살리신' 찬송가 곡조에 맞추어 링이 울리는 휴대폰을 가진 한 조선족 선교사를 만난다. 그들은 곧 고물트럭에 올라타고 길림 쪽으로 방향을 잡은 후 우중충한 주택가 한 가운데 위치한 안가(쉘터)로 향한다. 조선족 선교사는 천 선교사를 도와 기증 받은 옷이 들어있는 가방 3개와 박스 하나, 그리고 배낭 하나를 트럭에서 내린다.

이곳에서 천 선교사는 이곳에 있는 탈북자들의 심령을 어루만져주고, 그들의 조급함을 달래는 일만 하지 아무도 이번 몽골행에 합류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의 운명을 자신의 손으로 좌지우지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천 선교사는 마음이 편치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중 누가, 언제 몽골로 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정한 공식은 없다. 결정은 일부 현실적 상황에 따라, 일부는 정치적 요인에 따라, 그리고 나머지는 직감에 따라 이루어진다.

만약 한꺼번에 너무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가면 잡힐 위험도 높고, 한국 정부가 그들을 받으려고 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그들 중 한국에 친지가 있는 사람들은 우선적으로 배려를 받는다. 하지만 그는 또한 다양한 요인들을 고려한다. 어린아이만 가게 되면 그 아이를 돌볼 사람을 넣고, 가장 위험한 상황에 있는 사람과 한국에 가서 가장 적응을 잘 할만한 사람, 그리고 믿음이 두터워진 사람을 택해 넣기도 한다.

천 선교사와 조선족 선교사는 지저분한 아파트 계단을 몇 층 올라가 거의 가구장식이 없는 아파트 안으로 사라진다. 갓 없는 백열전등 두 개가 잘 정돈된 실내를 밝히고 있고, 밥짓는 냄새가 부엌에서 솔솔 풍기어 온다.

미국의 유아방 같은 곳에서 볼 수 있는 초록색 쿠션타일들을 깔아놓은 실내에는 10명의 탈북자들이 모여 있고, 방 한쪽으로는 이불이 가지런히 개어져 놓여있다. 방안에는 또한 한글성경책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이 곳에서 탈북자들은 매일 새벽 5시면 일어나 예배보고, 성경을 읽는다. 그 외에는 특별히 다른 할 일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이 좁은 공간에서 쌓이는 스트레스를 서로에게 해소한다. 싸우는 것이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잡혀가는 이유도 바로 이 싸움에 있다. 싸움은 이웃의 주의를 끌고, 수상히 여긴 이웃은 공안에 알리는 것이다.

천 선교사는 이들 중에 전과자나 심지어는 북한의 이중간첩이 있을 수도 있다고 한다. 한번은 어떤 여자가 그에게 마약을 나르는 심부름을 시도한 적도 있었다.

천 선교사는 아직도 동정과 분노 사이를 왔다갔다하고 있나 보다.

“그들은 그저 삶의 벼랑 끝에 선 사람들일 뿐이죠”라고 하면서도, “내가 교인만 아니었다면, 죽여도 시원찮았을 거요”라고 슬쩍 농담을 던진다.

이들은 상당히 문화수준도 높고, 세련되어 보였다. 하지만 지금 이들은 한국 행을 위해 면접시험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다. 천 선교사가 말씀을 전하기 시작하자, 그들은 그의 주위로 몰려온다. 그는 믿음은 그냥 기도하고 성경을 달달 외우는 것만이 아니라고 했다. “믿음은 사람을 대하는 것에도 있다. 너희들이 서로 싸우는 것은 하나님을 공격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이어서, “부자가 되는 것만이 행복해지는 길은 아니다. 한국에 온다면 너희들에게 정착금과 집을 준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이런 것들을 받지 못해도 가족과 친구가 있다. 그것이 공평하냐?”라고 했다.

“그들이 1시간을 공부한다면, 너희는 10시간을 해도 모자란다. 그들이 걸으면, 너희는 뛰어 야 한다. 한국에서 너희가 따라갈 수 없는 이유는 바로 공평하게 게임을 시작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너희는 그것을 가지고 싸우고 불평한다. 그게 바로 너희의 문제다. 북한에서는 게으른 삶을 살게 가르친다. 북한에서는 태어나서부터 모든 것이 공짜이기 때문이다.”


쉘터(안가) 방문

이번 그룹은 모두 북한과 중국 국경지방 중 동쪽 끝 가까이에 있는 연길 쪽에 숨어살던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이곳에 사는 조선족 가운데 많은 노인들은 1910년부터 1945년 사이의 일본 식민지 시대에 중국으로 넘어온 사람들이다. 그래서 북한에서 탈출한 이들 중에는 그들에게 도움을 줄 친척이 이곳에 살고 있는 경우가 더러 있다.

앞으로 이틀 동안 천 선교사는 이곳에서 5개의 쉘터를 방문하며 말씀을 전하고, 위로를 하며, 몽골로 갈 사람을 선택하는 작업을 할 것이다.

그는 한 아주머니가 4명의 북한 어린이들을 돌보고 있는 어느 깨끗한 아파트에 들렀다. 그 아이들은 건강하고 잘 적응하고 있는 듯이 보였으나, 나이에 비해 몸집이 매우 작았다. 그들 중 대부분은 정확하게 북한 땅에 기근이 시작된 90년대 중반부터 몸이 성장을 멈춘 것으로 보였다.

3살박이로 보이는 6살 된 남자 아이 하나가 외국인인 기자의 무릎에 올라와 앉는다. 이 아이는 자기는 커서 목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 1년반 전, 이 아이의 삼촌은 영양부족으로 잘 걷지도 못했던 이 아이를 교회 앞에 두고 갔다. 13살 먹은 여자아이는 시장에서 구걸하다 이리 오게 되었다. 6살, 7살도 채 안 돼 보이는 10살, 11살된 남자아이들의 부모는 아이들에게 꼭 돌아올 것이라고 말하고 떠났다.

돌보는 아주머니는 나이가 어린 아이들을 아예 자기 아이로 통할 수 있도록 시도하고 있다. 그녀는 아이들을 학교에 입학시켰고 아이들은 빠른 속도로 중국어를 배워나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부모에 한 아이밖에 가질 수 없는 중국의 현실 속에서 이 방법이 언제까지 유효할지는 의문이라고 한다.
 
또 다른 아파트에는 3년 동안 밖에 나가보지 못한 11살 난 여자아이가 살고 있었다. 천 선교사는 참견하기 좋아하는 중국인들이 왜 저 아이는 학교도 안가고, 중국어도 못하는지 알아 낼까봐 두려워했다. 그 아이는 엄마를 따라 강을 건너왔는데, 기차역에 도착했을 때 언니가 사라졌다고 했다.

선물로 준 연습장에 그림을 그리고 있는 이 여자아이에게 천 선교사는 “내가 너를 한국에 데려다 주마. 넌 한국가면 공부를 잘 할 거야”라고 하며 그 아이의 어머니에게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당부했다.

쉘터 순례가 끝나자 천 선교사는 서둘러 이번에 떠날 사람들의 명단을 5명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들이 사는 쉘터에 휴대폰으로 전화를 하면서 마지막 순간 젊은 부부를 추가해 명단은 7명으로 늘어났다.


선택된 7명

월요일 오후 늦게 그들은 연길에 있는 선교사 겸 비지니스맨의 아파트에 집결하였다.

천 선교사의 전리품인 그 여자도 있었다. 32살의 그녀는 북한의 어느 핵미사일 공장에서 작은 작업반 반장을 지냈다고 한다. 작은 몸집에 안경을 쓰고, 문신해 ?은 듯한 눈썹을 가진 그녀는 북한 노동당의 젊은 간부로써 대학을 나왔고, 총과 수류탄 다루는 법을 배워 매년 예비군 훈련을 받아온 사람이다. 그녀가 말한 것이 사실이라면. . .

그런 그녀는 영양실조와 결핵에 걸린 언니가 치료를 받을 수 없자 현실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녀는 강을 건너 중국으로 들어왔고, 한 교회를 통해 언니를 위한 약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북한 당국은 약을 들고 돌아가는 그녀를 잡아, 종교와 가라오케에 대한 심문을 했다. 그녀의 표현을 빌리면 '인생을 즐기는 것'에 대한 북한당국의 심문으로 말미암아 그녀는 북한이 어떻게 주민들을 콘트롤하는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웃고 싶어도 웃으면 안되고, 울고 싶어도 울 수 없다”라고 그녀는 눈물을 찍으며 말했다. “삶의 목적이나 종교 같은 것은 생각해 볼 수조차 없었다. 나는 언제나 당(黨)만을 생각했어야 했다.”

그녀는 2년 반 동안 중국 농가에서 고된 노동을 한 덕분에 박힌 손바닥의 굳은살을 뜯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때 배운 중국어가 이번 여행에서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또 선택된 사람 중 하나는 35살의 남자다. 곱슬머리에 검은 자켓을 입은 그는 형과 조카가 굶어 죽자 3년 전 탈북했다. 그는 중국에 와 농가에서 일하다 잡혀가 북한 강제노동 수용소에서 14개월을 보낸 후 중국으로 다시 넘어와 1년 동안 쉘터에서 살았다.

“나는 하나님을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북한에서 나는 정치범 취급을 받았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위해 살고 싶습니다. 자유를 원합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늠름한 체구의 또 한 사람은 39살 남자로 10년간 북한군에서 복무할 때 한국과의 국경에 있는 특수부대에 배치되어 있었다고 했다.

가족이 굶주리자 그는 중국에 와서 2년 동안 농가에서 일했다. 그 후 집으로 돌아온 그는 이미 딸과 부인도 중국으로 달아났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다시 중국으로 가서 그들을 찾던 도중 붙잡혀 북한으로 송환되었다. 송환될 당시 그는 고향으로 그를 호송하던 기차의 유리창을 깨고 탈출하였다. 그의 팔에는 아직도 그 흉터가 남아있다.

그는 탈출 시 3명의 경찰을 때려눕히고 도망쳤기 때문에 이제 경찰은 두렵지 않다고 했다. 오히려 그는 다른 탈북자들을 경계하면서 기자에게 한국에 가면 자신이 어떻게 되겠는지 묻는다. “한국에 간 탈북자들이 잘 사고 있습니까? 원하는 직업을 가질 수 있습니까? 나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긴 갈색머리를 한 24살 여자는 불법 브로커의 약속에 속아 중국으로 넘어왔지만, 브로커는 그녀를 병든 중국남자에게 4백불에 팔아 넘겼다. 그녀는 그 중국남자에게 끌려가 외진 시골마을에서 농사일을 하면서 남자의 가족이 원하던 아들을 낳아주었건만 그들은 그녀를 때리고 학대하기 시작했다.

한 마을의 아는 사람이 도와주어 그녀는 달아날 수 있었으나, 그 아는 사람은 “마음을 강하고, 냉정하게 해야한다”면서 두 살배기 아기를 두고 가라고 했다. 그녀는 연길에서 천 선교사의 조수를 만날 수 있었고 그가 천 선교사에게 그녀를 데리고 갈 것을 종용했다.

그녀는 종교를 이해할 수 없다고 털어놓았다.

“나는 100% 신을 믿지 못한다”고 말하면서도 그녀는 한국과 미국이 북한보다 번영할 수 있었던 이유가 이들 국가의 종교적 성격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나는 한국사람들을 잘 살게 해준 하나님의 힘을 한 번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습니다”고 그녀는 들뜬 목소리로 말한다.

그리고 젊은 커플이 있다. 거의 교만하다 할 만큼 당당한 데가 있는 남자는 25살로 다섯 번이나 북한으로 송환되었었다. 네번은 중국에서 잡혔고, 한번은 천 선교사와 함께 베트남을 경유하는 탈출을 시도하다가 잡혔었다. 그의 20살 된 여자친구는 이번이 첫 번째 시도다. 그녀는 유행하는 옷을 걸쳤고 예뻤다. 천 선교사가 그녀의 귀걸이를 보고 장난을 걸자 그녀는 연길의 가족이 준 것이란다. 그년의 부모와 형제들은 다음 주나 그 다음 주 떠나는 팀에 끼어 올 예정이다. 등에 작은 배낭을 멘 그녀는 이번 여행에 짐을 가지고 나선 유일한 멤버이다.  
마지막 멤버는 굉장히 경직되어있다. 그는 한번 잡혀 북한으로 송환된 적이 있는데 두리하나는 여러 사람을 통해 무려 1만불이나 되는 돈을 풀어 그와 당당한 태도의 25살짜리 남자를 빼냈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북한에서 사형을 당할 뻔했다.


몽골로 가는 길

천 선교사는 이제 이 7명을 4일 동안 기차에 태워 몽골 국경까지 보내는 험한 여행에 나설 것이다. 기차는 1960년대에 나온 녹색과 황색 객차다. 믿음직한 조선족 한 명이 이들과 함께 동행하고, 천 선교사와는 휴대전화로 계속 연락할 것이다.

천 선교사는 북한 미사일 공장에서 일하던 사람을 그룹의 리더로 선정했다.

천 선교사는 연길시내 한 안가의 응접실에 모인 그룹을 향해, “이 분이 모든 것을 다 압니다”라고 하며 그녀를 지적했고, “이 여자를 따르세요. 내가 다 말해 놨으니까 아무 질문도 하지 마세요. 내가 모두한테 다 알려주면, 제각기 다 싸울 테니까 이 여자한테만 알려줬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합니다”라고 당부했다.

미사일 공장에서 일했다는 여자와 팔려갔던 여자가 함께 앉아 자매인 것처럼 하기로 했다. 젊은 커플은 그대로 함께 행동하기로 했고, 나머지 남자들 세명은 친구로 가장하기로 했다.

“기도합시다.” 천 선교사가 말했다. 그룹 리더가 나지막하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들은 밤이 다가오자, 둘, 둘, 그리고 셋씩 아파트를 빠져 나와 기차역으로 걸어갔다. 기차표는 딱딱한 의자에 앉는 표로 1인당 50불짜리다. 침대칸 기차나 비행기는 신분증을 확인하기 때문에 아예 엄두도 내지 못한다.

그들 주변에서 다른 승객들이 큰 마대 자루들을 머리 위 짐 선반에 올려놓는다. 희미한 형광등 불빛은 객차 안을 간신히 밝혀줄 정도고, 7명이 열차에 올라탄 시점이 열차가 시발역에서 출발한지 고작 해야 한 시간 지났을 정도였을 텐데 구식 화장실에서는 벌써 냄새가 폴폴 새나오고 있다.

열차가 역에서 빠져 나오자 도시풍경은 급속히 마차가 오가는 농촌풍경으로 바뀐다. 그 위로는 한가위 보름달이 휘영청 떴다. 열차 안에서는 판매원이 구운 닭, 찐 옥수수, 잡지 등을 사라고 고함치기 시작하고, 일곱 명 중 네명은 벌써 천 선교사가 준 용돈을 꺼내 잡지를 산다. 이들이 사는 잡지가 모두 같은 것임을 보고 천 선교사는 “돈 아껴라. 하나 사서 나눠보면 되잖아”라며 나무란다.

기차 위에서 이들을 배웅하고 나서 천 선교사는 다른 쉘터들에 전화해 본다. 더 많은 쉘터를 방문하고 떠나기 위해 서이다. 내몽골 자치주의 수도 후하호터로 가는 도중에 이 일곱 명중 누가 한국에 가서 더 잘 적응할지를 물어보았다.

팔려갔던 여자는? “골칫덩어리가 될 겁니다”라고 천 선교사는 대답한다.

젊은 커플은? “내 속께나 썩이겠지요.”
그럼 대체 왜 이 일을 하는 건가? 천 선교사는 이것이 그의 기독교적 의무라고 믿는단다.

“이 사람들의 모습만 보면, 단 한 사람도 한국으로 데려올 만한 이유를 찾기 어렵습니다”라는 천 선교사는 “사람들은 '왜 착한 사람들만 골라서 데려오지 않습니까?'라는 질문을 많이 하지만 저는 이것이 바른 생각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이들은 다 하나님의 백성이고, 우리에게는 이들을 구해주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들이 죽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고 말했다.

후하호터에 도착하자 천 선교사는 5시간이 걸리는 국경까지 사용할 택시를 대절한다. 국경까지 가는 길에는 추수를 앞둔 밭 위에 낙타도 가끔 보이고, 양과 염소는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 듯하다. 감자자루를 하늘 높이 실은 대형트럭이 스치고 지나간다. 천 선교사는 해가 떨어지기 전에 탈북자들이 넘어야 할 국경의 철조망 모습을 비디오 카메라에 부지런히 담는다. 그러다가 택시가 모래 속에 빠져 버렸다. 여러 번 끌어내려는 시도가 실패한 끝에 택시 운전사가 도로공사용 차량처럼 보이는 트럭 가운데 한 대를 손짓해 세운다.

천 선교사는 트럭 운전사와 흥정하여 일단의 '연구원'들을 그 날 밤 트럭에 태워 철조망까지 데려다 주도록 약속한다. 하나님이 보내주신 트럭인 것 같다. 이걸로 탈북자들은 바로 국경통과지점까지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전 그룹은 그 훨씬 뒤에서 출발하여 이틀동안이나 헤맨 덕에 10세 소년 한 명이 탈진으로 사망하기도 했다.


가차로 국경도착

몽골로 들어가기 전 중국 땅 마지막 도시인 얼렌호트의 한 레스토랑 별실 안에서 천 선교사는 기차로 도착한 탈북자들을 맞으며 가벼운 농담을 건넨다.

도착한 그들 사이의 관계는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함께 동행했던 조선족 사역자에 따르면 리더를 맡은 여성은 특수부대 근무를 했던 남자와 (아마도 남녀관계로) 친해져 있었는데, 이 남자는 플랫폼에서 담배를 피우는 바람에 공안에 걸려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험에 몰아넣을 뻔했다. 또 한 가지 변화는 천 선교사가 마지막 순간에 여자친구와 함께 추가로 끼어준 젊은 남자가 실질적인 리더로 부상한 사실이다. 그는 가장 침착하고 자신 있어 보였다.

커다란 원형 테이블에 자리잡은 후 천 선교사는 이어서 몽골 사람들이 돈이나 귀중품은 모두 압수할 것이니 자기에게 맡기라고 말했다. 그들이 서울에 도착하면 다 돌려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지만 누구도 맡기는 사람은 없다.

“아마 그들이 갖고 있는 돈이란 게 너무도 적은 액수라 한국에서는 밥 한 끼도 사 먹기 어려울 겁니다.” 천 선교사는 나중에 이렇게 설명했다. “그런데도 나를 믿지 못하는 겁니다. 그 사람들은 아마 내가 무슨 꿍꿍이속이 있어 이런 일을 하는 줄 착각하고 있을 겁니다.”.

천 선교사는 이어서 “지금 당장 배고프지 않아도 많이 먹어야 한다”고 권했다. 하지만 아무도 음식을 드는 사람이 없다. 너무 긴장한 탓이다.

마지막으로 천 선교사가 기도할 것을 제안하자 사람들은 손에 손을 잡고 마지막 합심기도를 드린다.

“하나님께 감사 드립시다.” 천 선교사가 말했다.

들떠 있던 인신매매 피해자는 이제 사뭇 두려움에 휩싸여버린 상태다.

자신감 넘치는 젊은 남자는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탈 때까지는 잠을 자지 않을 것”이란다. 천 선교사는 그 남자에게 휴대전화를 주며 국경을 넘자마자 전화를 하라고 지시한다.

그들이 트럭에 올라타자 매서운 바람이 뺨을 할퀴고 지나간다. 커다란 오렌지 빛 보름달이 떠오르면서 간간히 눈발이 내린다. 달은 떠올라 하늘 높이 제자리를 찾아들면서 창백한 흰색으로 바뀐다. 하늘 가득히 수놓은 별들이 비춰주는 길을 따라 트럭은 점점 더 국경 가까이로 움직인다. 멀리 약 1마일 거리에 몽골 쪽 국경수비대의 망대가 보인다.

철조망에 다가가자 트럭운전사는 헤드라이트를 끄고, 탈북자들은 다섯자 높이 트럭에서 일제히 뛰어내린다. 그들은 이제부터 죽을힘을 다해 뛰어야 한다. 그들은 1분도 안돼서 철조망 밑을 기어 들어가 사막의 밤 속으로 사라졌다.

10분 후, 천 선교사의 휴대전화기가 울렸다. 리더는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들의 위치를 밝혔고, 천 선교사는 아직 중국 국경만을 넘었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두 나라 사이의 무인지대이므로 계속해서 더 가야 한다.

천 선교사도 흥분했다. 계획했던 것 보다 좀 더 순조로웠다.

25분이 더 지나자, 리더가 다시 전화해서 숨이 찬 목소리로 “도착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에필로그

몇 주 후면 그들은 비행기로 한국에 보내질 것이다.

하지만 석 달 후 천 선교사는 다른 탈북자들 12명을 탈출시키다 몽골 국경에서 중국 공안에 붙잡혔다.

그는 '비법 월경 자들을 조직, 운송한' 죄목으로 7개월 동안 옥살이를 한 후, 한국과 미국에서 석방을 호소하고 6천불 벌금을 지불한 결과 한국으로 추방당했다. 그는 감옥에서 밀가루 떡 한 덩이와 물만으로 살았고, 감방은 비좁고 추웠으나 영적으로는 행복했다고 말한다. “아마도 성경말씀이 나를 지탱해 준 것 같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북한 미사일 공장에서 일했다던 여성은 그런 적이 없었고, 그녀의 남편이 일했던 것으로 판명됐다. 그녀는 이제 서울시내 한 공단에 소재 한 허름한 휴대폰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 그녀는 북에 두고 온 가족, 그 중에서도 6살 먹은 아들을 몹시 그리워하고 있다.

“나는 이 풍요로운 곳에서 혼자만 외롭게 삽니다”고 그녀는 말한다.

중국에 남아 있던 다른 탈북자들은 중국 신분증이 없어서 모두 잡혀갔다.

몽골로 간 젊은 커플 중 여자쪽 부모와 형제들, 그리고 몇 년 동안 집밖에 나가보지 못한 11살짜리 여자아이와 그 아이의 어머니가 그 중에 포함되어 있다.

천 선교사는 또 그렇게 잡혀간 사람들 중 일부가 자신에 대한 제보를 하겠다고 자원했다는 소식도 들었다.
 
그러나 천 선교사는 서울에 돌아오자마자 전화기를 붙들고 일하기 시작했다. 이제 중국에는 들어가지 못하지만 그는 계속 이 일을 할 것이다.

“그들이 겪는 어려움을 조금이나마 내 몸으로 직접 체험했으니 이전보다 더욱 더 그들을 돕겠습니다”고 그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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